[여의도포럼] 대한민국 화폐에 새겨진 초상

입력 2025-02-06 00:31

한민족 5000년 역사 중에서 가장 풍요로운 시대에 살지만
국가적 지향점 상징할 인물은 조선시대 성군과 유학자들뿐
독립투사·건국영웅 못 넣는 것 이념 치우쳐 싸우는 탓 아닌가

최근 대부분의 결제가 신용카드나 모바일로 이뤄지고 실물화폐 사용이 줄어들면서 일상에서 지폐와 동전을 접하기 쉽지 않다. 하지만 지난주 설날에는 많은 이들이 세뱃돈을 주고 받으며 오랜만에 지폐를 접했을 것이다. 화폐를 살펴보면 조선시대의 예술가, 군주, 학자, 장군으로 채워져 있다. 대부분 국가의 화폐에는 건국에 이바지했거나 국가 발전에 기여한 인물의 초상이 새겨져 있지만 우리 화폐에는 대한민국 인물의 초상이 보이지 않는다. 조선시대에 국가의 틀을 완성한 세종대왕과 건국 이념인 성리학을 발전시켜 현실 정치에서 구현하고자 했던 학자이자 정치가인 율곡 이이, 퇴계 이황은 화폐에 등장하지만 일본의 압제로부터 독립을 쟁취하고 대한민국의 건국을 견인한 인물도, 대한민국의 통치 이념인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틀을 확립한 인물도 화폐에는 등장하지 않는다. 화폐에 새겨진 역사적 인물의 초상은 국가의 가치를 상징적으로 전달하는 매개체인데 말이다.

지난 수십년간 대한민국은 한반도 5000년 역사상 가장 풍요롭고 평화로운 시대를 열어 왔다. 대한민국은 지난해 기준으로 군사력 세계 5위, 수출 규모 세계 6위, 경제 규모 세계 14위인 강대국으로 우뚝 섰다. 수치로 나타나는 경제력과 군사력뿐만 아니다. K콘텐츠는 글로벌 온라인동영상서비스(OTT) 시청률 순위에서 상위권에 위치하고, 해외여행 중 현지에서 라디오를 틀면 심심치 않게 K팝이 들리고 시내 중심가에는 줄을 길게 늘어선 한식당을 접하는 것도 낯설지 않을 만큼 문화적으로도 성장하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조선시대에 갇혀 있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최근 이념 갈등이 극에 달하는 상황에서 좌파는 극일을, 우파는 반중을 외치지만 어쩌면 우리가 극복해야 할 대상은 조선일지도 모른다. 한반도에서 이어진 5000년 역사를 부정하고자 함도 대한민국의 뿌리인 조선을 부정하고자 함도 아니다. 그리고 화폐에 새겨진 인물들의 업적을 폄하하고자 함은 더더욱 아니다. 다만 대한민국이 건국과 함께 지향해온 가치가 무엇인지, 이념을 달리할지라도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구현해야 하는 가치가 무엇인지에 대해 묻고 싶을 뿐이다. 그리고 그 답을 화폐에 등장하는 인물을 통해서 공유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각국의 화폐에는 국가가 지향하는 가치를 구현한 인물을 새겨 넣기도 하지만 국가의 발전 전략과 궤적을 같이하는 업적을 쌓은 인물을 넣어 국가의 발전 전략을 국민에게 제시하고 참여를 유도하기도 한다. 대한민국은 6·25전쟁으로 인한 폐허 속에 교육을 통한 기술 발전과 도전적인 기업가 정신을 기반으로 경제성장을 이뤘지만 경제발전의 초석을 다진 정치인과 기업인 그리고 교육자와 과학·기술자는 화폐에서 찾아보기 힘들다. 천연자원도 부족하고 생산가능인구도 감소하는 상황에서 대한민국의 성장 전략은 여전히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기술 확보와 글로벌 시장을 공략할 수 있는 기업가 정신임에도 말이다.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딥시크의 출현으로 정부와 기업들은 중국과의 인공지능(AI) 관련 기술 격차를 분석하면서 중국에 비해 턱없이 작은 투자 규모를 지적하고 있지만 더 큰 문제는 유교 사상에 뿌리를 둔 사농공상 문화에서 기인한 과학·기술인에 대한 낮은 처우다. 우리는 여전히 조선의 틀에 갇혀 있는 듯하다.

대한민국의 통치 이념인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의 틀을 확립한 인물도, 경제발전의 초석은 다진 인물도 우리 근대사에 다수 존재하지만 그들의 업적이 과오에 묻혀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 어느 시대건 어떤 분야건 업적을 쌓은 인물에게는 공도 있고 과도 있기 마련이다. 이스라엘 민족이 가장 존경하는 인물인 다윗도 영토를 확장하고 국부를 축적해 국가의 기반을 닦았지만 말년에 간음과 살인의 죄를 짓는 우를 범했다. 중국 화폐에 새겨진 유일한 인물인 마오쩌둥이 사망하자 문화혁명과 대약진운동의 실패를 이유로 그에 대한 격하운동이 일어나면서 중국 전역이 혼란에 휩싸이자 문화혁명의 최대 피해자였던 덩샤오평은 ‘공은 일곱, 과는 셋’이라는 말로 마오쩌둥의 혁명을 평가하며 혼란을 잠재운다. 우리는 이념에 치우쳐 지나치게 공을 폄하하고 과를 부각하는 우를 범하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봤으면 한다. 그들이 이뤄낸 성과가 쌓여 오늘의 풍요로운 대한민국을 이뤘는데도 말이다.

박희준 연세대 산업공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