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섬情談] 환난을 각오하는 이들의 글을 다시 읽다

입력 2025-02-05 00:35

사사로운 이익 위해 무속에
기댄 권력자들… 가증스런
인신 제사와 무엇이 다른가

2016년 10월 28일, 압도적인 글을 읽었다. 문장은 단호하고 글의 흐름은 통렬했다. 그 글을 읽던 순간을 지금도 생생히 떠올릴 수 있다. 심지어 그때 앉아 있던 책상과 그 위에 놓여 있던 책들, 바로 옆의 음료수 캔 색깔까지 기억이 난다. 이 글은 당시 신학생시국연석회의가 발표한 성명서로, 구약성서 ‘레위기’의 한 구절을 인용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너는 네 자식들을 몰렉에게 희생제물로 바치면 안 된다. 그렇게 하는 일은 네 하나님의 이름을 더럽게 하는 일이다. 나는 주다.”

몰렉은 가나안과 페니키아 지방 일대에서 숭배되던 고대 근동의 신이다. 주로 날카로운 뿔을 가진 수소나 염소의 머리를 가진 것으로 묘사됐으며, 7개의 구멍이 뚫려 있는 청동 신상 아래에는 불이 활활 타오르는 아궁이가 있었다. 사람들은 구멍에 차례로 밀가루와 암양, 암소, 산비둘기 등을 집어넣고 마지막에는 인간의 아이를 넣으며 인신 공양의 제사를 지냈다고 전해진다. 이것이 실제로 아이를 죽여 바치는 것인지, 상징적인 봉헌 행위인지 현대 학자들의 의견은 분분하다. 하지만 성서 곳곳에서 여호와가 인신 제사를 가증스럽게 여기고 금지하려 했던 것은 명백하다.

다음 구절로 넘어가자. 신학생들은 바울 일행이 빌립보에서 겪은 사건에 대해 쓴다. 귀신의 힘으로 점을 치는 여종이 바울 일행을 귀찮게 쫓아다니자 바울은 그에게서 귀신을 간단히 쫓아내 버린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여종을 부려 점을 치게 해서 돈을 벌던 이들은 돈벌이 수단이 사라지자 화가 나서 바울과 실라를 매질하여 옥에 가둔다. 결국 문제는 귀신이 아니라 귀신을 부려 돈을 벌고 이득을 취하는 사회라는 점을 당시의 바울이 간과했다고 신학생들은 담담하고 명료하게 지적한다.

당시는 이른바 ‘최순실 국정농단’으로 나라가 한창 시끄럽던 때였다. 그들은 질문한다. 문제는 대의제로 선출된 공복인 대통령에게 최서원(개명 전 최순실)이라는 귀신이 깃들었기 때문인가. 그를 제거하면 모든 문제는 끝나는가. 그렇지 않다. 지금의 사회체제 자체에 귀신이 들려 있다. 수백억원의 출연을 받아 자신의 재단을 세우고, 그 대가로 세제 혜택과 규제 완화라는 기도 응답을 받는 이들이 있다. 반면 같은 시간 어떤 이는 물에 빠지거나 물대포에 맞아 죽는다. 신학생들은 질문한다. 어느 한쪽이 헌금으로 인한 물질 축복을 누리는 동안 어느 한쪽이 죽임을 당하는 체제와 인신 공양의 사교(邪敎)는 무엇이 다른가.

그래서 그들은 체제와의 싸움을 선언한다. 이어지는 글은 자못 아름답고 결연하다. 불의에 맞선다는 자신들의 선언이 말뿐이 아닌 실천이 된다면 그들은 세상에서 환난을 당할 것이다. 공중권세 잡은 이들은 강해 보이고 자신들은 스스로가 보기에도 ‘메뚜기와 같이’ 초라하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세상을 이기셨고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기 때문에 신학생들은 용기를 낸다.

이 이야기의 가장 아름다운 지점은 신학생들이 스스로의 이익이 아니라 환난을 선택한다는 점이다. 인신 제사는 본질적으로 이익을 위해 다른 이의 희생을 요구하는 행위다. 하지만 광야의 그리스도는 인신 제사는커녕 자신의 배를 채우기 위해 돌을 떡으로 만들지도 않는다. 자신의 굶주림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먼저 생각하는 그리스도의 승리는 곧 세속의 보신주의에 대한 윤리학의 승리이기도 하다.

2025년의 지금, 공화국에 깃든 귀신은 사라졌는가. 나는 성스러운 것과 삿된 것을 구분하고 공동체를 지탱해 온 전통 신앙을 함부로 매도하는 일이 옳지만은 않다고 믿는다. 문제는 오늘날 권력자들에게서 발견되는 무속의 의혹이 하나같이 그들의 이익을 향한다는 점일 듯하다. 선거에서 이기기 위해 손에 임금 왕(王)자를 쓰거나, 집무실의 터를 따지고 점쟁이에게 길흉을 묻는 일이 옳고 그름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모두가 자신의 이익을 점치고 셈하는 이 세계에서 환난을 각오하는 이들이 외롭지 않다면 좋겠다.

김현호 사진비평가·보스토크 프레스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