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에도 특정 국가의 우회수출을 위한 생산 기지화됐던 국가들은 고용 창출, 수출 증가 등 경제적 이익을 봤지만 독자 기술력을 키우지 못하며 경쟁력을 잃었다. 중국의 우회수출 시도가 본격화할수록 한국 제조업도 장기적으로 경쟁력이 약화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3일 업계에 따르면 국내 제조업 기업들은 수년째 중국산 저가 공세에 몸살을 앓고 있다. 한국철강협회에 따르면 지난해 중국산 철강재 수입량은 전년보다 6.1% 증가한 877만톤으로 2017년 이후 최대치를 기록했다. 국내 시장에서 중국산 후판은 국산보다 20%, 열연강판은 5~10% 저렴하게 유통된다. 국내 산업용 로봇 시장에서 수입 제품의 시장점유율은 2021년 75%에서 2023년 81%로 늘었다. 제조업계의 고사 위기가 지속되며 올해 1분기 제조업 경기전망지수(BSI)는 61을 기록해 2020년 4분기 이후 최저치로 떨어졌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 기업의 우회수출을 위한 조인트벤처 설립, 위탁생산 등 요구를 받아들이는 게 도움이 될 것이란 분석이 있다. 국내 기업들이 바닥으로 떨어진 공장 가동률을 올릴 수 있는 데다 일자리 창출 효과도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익명을 요구한 한 경영학과 교수는 “중국 기업의 생산기지가 되면 부가가치 창출분만큼 한국 경제에 도움이 되고, 고용 창출 효과 등 기대할 수 있다”며 “냉정하게 보면 한국이 손해 볼 것은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국내 산업이 독자적인 기술력을 갖추지 못할 경우 중국 의존도가 높아지며 산업이 황폐화할 가능성이 제기된다. 태국 자동차 산업은 자체 경쟁력을 키우지 못하고 저부가가치 산업 구조가 고착화된 대표적인 사례다. 태국은 한때 동남아시아 최대 자동차 생산국이자 수출국으로 ‘아시아의 디트로이트’로 불렸다. 도요타, 미쓰비시 등 일본 기업들이 1960년대부터 태국을 생산 기지로 삼아왔으며, 최근엔 비야디, 상하이자동차 등 중국 전기차 업체가 점유율을 크게 늘리고 있다.
그러나 태국은 이렇다 할 자국산 브랜드가 없다. 완성차를 생산하기 위한 핵심 전자 부품을 자국 내에서 조달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일본과 중국의 완성차 업체에 종속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실제로 태국 정부는 지난해 7월 현지에 진출한 중국 전기차 업체들을 대상으로 조립 과정에서 태국산 부품을 최소 40% 이상 사용할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중국 업체들이 향후 중국 부품 업체와 자체적인 공급망을 구축하는 상황을 우려한 것이다.
말레이시아의 반도체 산업도 비슷한 상황이다. 말레이시아는 세계 반도체 수출 5위 국가로 조립·테스트·패키징(ATP) 등 반도체 후공정 세계 시장의 13%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나 외국 반도체 제조업체에 장기간 의존하며 삼성전자나 대만의 TSMC처럼 첨단 반도체 제조 기술은 개발하지 못했다. 말레이시아는 최근 베트남, 인도 등이 반도체 공급망의 새로운 거점으로 떠오르면서 언제든지 대체될 수 있는 시장으로 인식되고 있다.
특히 중국의 생산기지로 기능하는 것은 미·중 무역 갈등 국면에서 위험 요인이 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한아름 한국무역협회 수석연구원은 “트럼프 대통령은 자국 내에서 공급망을 해결하겠다는 의지가 강하다”며 “아직 한국이 규제 우선순위에서 밀린 상태지만 중국의 우회수출 근거지로 활용되고 있다는 인상을 주는 것은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말했다.
임송수 백재연 기자 songsta@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