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의 사법화 현상과 달리
사법의 정치화는 용납 어려워
정치권 행태 가장 큰 문제지만
사법부 스스로 자초한 측면도
결론이 명확한 사안이라도
법리로 국민들 설득 못하면
민주주의 자체의 위기 올 수도
사법의 정치화는 용납 어려워
정치권 행태 가장 큰 문제지만
사법부 스스로 자초한 측면도
결론이 명확한 사안이라도
법리로 국민들 설득 못하면
민주주의 자체의 위기 올 수도
국가의 중요한 결정을 둘러싼 논란이 정치가 아닌 사법 과정으로 해소되는 현상을 가리키는 ‘정치의 사법화’는 다소간 필연적이다.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다른 나라에서도 나타나는 현상인데다 갈등을 조정하는 역할을 법원이 해주는 측면도 있기 때문이다. 과거사 문제나 신행정수도 건설, 간통죄, 존엄사, 국가보안법 등을 둘러싼 논쟁이 어느 정도 일단락된 과정에는 사법부의 역할이 적지 않았다고 평가된다. 제도권 정치가 선뜻 나서지 못했던 사회적 약자의 권리 신장 측면에서도 긍정적인 부분이 있다. 대의제 민주주의를 채택한 나라 상당수에서 정치의 사법화 현상이 나타나는 건 이 때문이다. 서구에서도 인종차별 종식 등 중요한 이슈들을 사법부가 결정한 사례가 많다. 정치 권력을 쥔 이들이 힘의 논리에 따라 비공식적으로 해결하던 사안이 공개적으로 논의되고, 정치를 통해 해결되지 못한 이슈에 대한 판단이 사법부의 영역으로 넘어오는 것은 일반적인 민주적 절차의 범주에 있다. 삼권분립의 원리가 위협받을 수 있다는 일각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정치의 사법화가 일정 부분 민주주의에 필요한, 바람직한 현상일 수도 있다는 학계의 의견이 적지 않은 이유다.
문제는 정치의 사법화를 넘어 사법의 정치화를 조장하려는, 정치권의 의도된 행위다. 소위 “법대로 하자”는 주장이 대표적인데, 이 같은 화법은 대화나 타협 등의 노력을 하지 않겠다는 것으로 사법적 판단 전까진 정치적·도의적 책임을 지지 않겠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하지만 헌법과 법률이 모든 사안을 규정할 수는 없다. 해석과 적용을 두고 대립이 불가피한 상황에서 ‘법대로’라는 말은 갈등을 조장하는 정치권의 수사에 불과하다. 궁극적으로는 사법 시스템이 정치적 이익과 목적에 따라 왜곡되거나 영향을 받게 되는 ‘사법의 정치화’로 연결된다. 상대 진영 인사를 고발·탄핵하는 과정에서 대통령은 물론 행정부의 각료, 입법부의 여야 의원들까지 사법적 결정에 의해 운명이 결정되는 사례가 이어지면 정치인과 공직자들은 이를 의식할 수 밖에 없다. 정치인 입장에선 지지가 확실히 담보되는 대법관·헌법재판관을 임명해야 할 이유가 늘어나는 것이다. 대법관이나 헌법재판관 후보군에 포함된 입장에서도 선명성 경쟁을 벌일 동기가 커진다. 중도 지향의 판사들이 고위직에 임명될 가능성은 점점 희박해지고 결국 이런 과정을 거쳐 임명된 고위 법관들은 진영에 더 충실한 판결을 내리는 악순환이 반복된다.
정치권의 행태가 사법의 정치화를 야기하는 가장 큰 이유지만 사법부도 책임에서 자유로울 순 없다. 국민의 신뢰를 받지 못하는 사법부의 모습은 스스로 자초한 부분도 적지 않다. 이른바 ‘사법농단(사법행정권 남용)’과 관련해 1심에서 무죄를 선고받긴 했으나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부터 대법원은 편파 논란의 중심에 있었다. 김명수 전 대법원장 시절도 마찬가지다.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을 심판하는 헌법재판소 재판관들의 성향에 대한 일각의 문제제기도 이 같은 불신의 연장선상에 있다.
이런 의심에서 벗어나려면 법원은 힘의 논리, 정치적 논리를 의식하지 않고 치밀한 법리와 논증을 통해 국민을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결론 자체가 명확한 사안이라도 마찬가지다. 사법부가 정치적 의도에 휘말려 판단하면 법적·절차적 문제가 뒤따르게 마련이고 자칫 스스로의 문제 있는 결정 탓에 결론이 왜곡되는 상황에 빠지게 된다. 사법부가 절차적 정당성을 확보하지 못한 판단을 내놓으면 과정에 대한 시비로 번져 스스로 권위를 무너뜨리게 될 수 있다. 정치적 사건에 대해 개인의 가치관이나 이념, 특정 정치세력의 이익에 따라 판단했다는 의혹까지 받게 된다면 단순히 사법부의 문제에서 끝나는 게 아니다. 국민들이 피로 일궈낸 민주주의가 송두리째 위협받을 수도 있다.
민감한 정치적 재판을 앞둔 시기엔 사법부가 특히 고려해야 할 게 많다. 특정 법관의 이동이나 휴직이 불신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는 점까지 따져봐야 한다. 규정에 따라 진행되는 인사 자체를 나무랄 순 없지만 정치적 이슈가 결합된 재판에서 비슷한 일이 반복되는 건 법원의 책임이다. 규정이 그러니 어쩔 수 없다는 식의 해명을 거듭 내놓지 않으려면 적극적인 대처가 필요하다. 소극적인 대처로 미봉하려다간 자칫 법원이 사법의 정치화에 휘둘리고 있다는 비판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정승훈 논설위원 shju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