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성수 특파원의 여기는 워싱턴] 팟캐스트에 문 활짝 연 백악관… 美 친트럼프 뉴미디어 황금기

입력 2025-02-05 00:36
캐롤라인 레빗 백악관 대변인이 지난달 28일(현지시간) 백악관 브리핑룸에서 첫 언론 브리핑을 진행하며 기자들의 질문을 받고 있다. 레빗 대변인은 이날 첫 질문 기회를 온라인 매체인 악시오스 기자에게 부여했다. UPI연합뉴스

레빗 데뷔 첫 질문도 온라인 매체
국방부도 기존 매체에 퇴거 통보

기성 언론은 각종 소송 시달리고
트럼프 비판 언론인 퇴사 잇따라
가디언 “트럼프, 美 편집 책임자”

“수백만 명의 미국인을 대표하는 새로운 매체에 목소리를 내주셔서 감사하다. 트럼프 대통령의 신속한 조치는 이전 정부와 극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브레이트바트 기자) “이 브리핑룸에서 미국 국민에게 말을 할 때 대통령을 대변할 것인가, 아니면 있는 그대로의 진실을 말할 것인가?”(AP통신 기자)

지난달 28일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입’인 캐롤라인 레빗 백악관 대변인의 데뷔 브리핑 중 백악관 출입 기자들과의 질의응답 장면이다. 첫 번째 질문은 트럼프 행정부가 지원을 약속한 ‘뉴미디어’를 대표해 브레이트바트 기자가, 두 번째 질문은 백악관의 기성 매체를 상징하는 AP통신 기자가 했다.

첫 번째 질문이 뉴미디어와 백악관의 협력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두 번째 질문은 레거시 미디어와 백악관의 전통적 긴장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레빗 대변인은 첫 질문권을 AP통신에게 주던 백악관의 관례도 따르지 않았다. 대신 온라인 매체 악시오스와 브레이트바트에게 먼저 질문 기회를 줬다. 브레이트바트는 트럼프 열혈 지지자들의 본거지나 다름없는 뉴스 사이트다.

트럼프 집권 2기가 공식 출범하면서 백악관 브리핑룸도 일대 변화를 맞고 있다. 독립 저널리스트와 팟캐스트, 인플루언서 등에게도 브리핑룸 출입을 개방해 1만건이 넘는 ‘뉴미디어’ 패스 신청이 쏟아졌다. 백악관은 언론 담당 직원들이 쓰던 브리핑룸 연단 옆 좌석 2개를 뉴미디어 기자에게 내줬다.

트럼프는 그동안 자신을 비판하는 뉴욕타임스·CNN 등 진보 성향의 레거시 미디어에 대해선 ‘가짜뉴스’ 낙인을 찍으며 비난했지만, 팟캐스트 등 뉴미디어와는 밀월 관계를 유지해 왔다. 트럼프는 지난 대선 때 촉박한 일정 속에서도 보수 성향의 뉴미디어에는 열심히 출연했다. 트럼프 2기 백악관이 언론 자유를 보장한 수정헌법 1조를 언급하며 브리핑룸을 개방한 것에는 트럼프에 우호적인 대안 매체들을 우군으로 삼으려는 전략이 깔려 있다.

폴리티코는 레빗의 첫 브리핑 풍경을 보도한 기사에서 “레빗은 비전통적 미디어, 특히 그녀를 칭찬하는 우파 언론에 특별한 관심을 보였다”며 “브리핑룸의 49개 좌석 중 맨 뒤쪽 좌석에 있거나 아예 자리를 배정받지 못한 비전통적 매체 기자들은 레빗의 변화에 고마워하는 모습이었다”고 전했다.

뉴미디어 중 가장 먼저 트럼프 2기 백악관 브리핑에 참여한 매체도 보수 성향의 ‘루스리스 팟캐스트’다. 주로 민주당을 비판하고 주류 미디어를 조롱해온 매체다. 지난달 31일 정치 컨설턴트인 존 애쉬브룩이 이 매체를 대표해 브리핑룸에 참석하자 레빗은 밝은 표정으로 “미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팟캐스트”라며 질문 기회를 줬다.

애쉬브룩은 기다렸다는 듯 “(기성) 언론이 국경 문제 해결을 원하는 미국인들과 동떨어져 있다고 생각하느냐”며 트럼프의 구미에 맞는 질문을 했고, 레빗은 “미디어가 확실히 시대에 뒤떨어져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정부는 위대한 나라의 이민법을 따르고 있다”고 장단을 맞췄다. ‘약속 대련’과도 같은 질의응답이었다.

백악관뿐 아니라 국방부에서도 우파 뉴미디어들이 부상했다. 지난달 31일 국방부는 뉴욕타임스와 NBC, 공영라디오 NPR, 폴리티코에 이달 14일까지 기자실에서 퇴거할 것을 통보했다. 브레이트바트뉴스와 원아메리카뉴스, 뉴욕포스트 등 우익 매체들에게 기자실을 사용할 기회를 주기 위해서였다. 국방부는 이를 가리켜 ‘새로운 미디어 순환 프로그램’이라며 새 매체에도 상주 기회를 주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공교롭게도 퇴거 통보를 받은 대상은 피트 헤그세스 국방장관의 지명자 시절 각종 단독 보도로 엄격한 검증을 주도했던 매체들이다. 국방부 기자단은 “국방부가 공화당과 민주당 행정부 아래에서 수십 년간 국방부를 취재해온 언론들을 선별해 지목한 것에 대해 큰 우려를 표한다”고 밝혔다.

트럼프가 아끼는 뉴미디어들이 ‘황금기’를 맞은 반면 기성 언론들은 각종 소송에 시달리며 찬바람을 맞고 있다. 트럼프는 CBS방송의 대표 시사프로그램 ‘60분’이 대선 때 경쟁자였던 카멀라 해리스 전 부통령을 미화했다며 선거 개입을 주장하는 소송을 제기했다. 최근 CBS의 모회사인 파라마운트가 트럼프에게 거액의 합의금을 주는 방안을 검토 중이라는 보도도 있었다. 트럼프는 ABC뉴스에도 명예훼손 소송을 제기했고, 대선 승리 뒤 합의금을 받아냈다.

트럼프에 대해 날을 세웠던 ‘스타 언론인’들도 회사를 떠나고 있다. CNN 앵커 짐 아코스타는 트럼프 2기 출범 이후 회사 측이 뉴스 진행 시간대를 심야로 바꾸자 18년간 재직한 회사를 떠났다. 아코스타 퇴사 소식에 트럼프는 트루스소셜에 “와, 정말 좋은 뉴스다. 언론 역사에서 최악의 기자이자 가장 부정직한 기자”라고 적으며 환호했다. 아코스타는 트럼프 1기 백악관을 출입하며 기자회견에서 수차례 트럼프와 충돌해 출입 정지를 당하기도 했다. 트럼프와 지지자들의 표적이 돼온 NBC방송의 유명 진행자 척 토드도 최근 회사를 떠난다고 선언했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지난 2일 미국의 미디어 환경이 트럼프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변화하고 있는 점을 언급하며 “트럼프가 미국의 편집 책임자가 됐다”고 표현했다.


임성수 특파원 joyls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