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양재 목사의 후한 선물] 돌이키는 자가 남는다

입력 2025-02-04 00:41

북이스라엘의 초대 왕 여로보암은 백성이 예루살렘에서 예배드리는 것이 두려웠다. 그래서 금송아지 두 개를 만들어 남과 북에 하나씩 두고는 “너희 하나님이 여기 있다”며 백성을 속였다. 이 악한 선택이 ‘여로보암의 죄’가 돼 200여년간 북이스라엘에서 반복됐다. 그 결론은 남은 것 하나 없는 멸망이었다.

어느 날 갑자기 무너지는 일은 없다. 붕괴 순간까지 점진적으로 무너지는 과정이 있다. 한순간 무너지는 것 같은 빙하도 사실은 수백 년 조금씩 녹아내린 결과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을 멀리하는 작은 선택들이 점차 쌓이다가 결국 우리 삶 전체가 무너지는 순간을 맞는다.

한 성도의 간증이다. 예수 믿기 전 그는 누가 교회 가자고 하면 “전 그런 데 안 가요. 의지 약한 사람들이나 가는 거죠. 저는 제힘으로 잘 살 수 있어요”라며 온몸으로 거부했다. 대신 불교와 무속신앙을 믿으며 자신만만하게 살았다. 그런데 결혼 후 남편 때문에 힘들어지자 생각이 달라졌다. ‘내가 무슨 업보로 이런 사람과 살아야 하나. 이번 생은 망했다’며 화병과 우울증에 시달렸다. 문제를 해결하려 무당을 찾아갔다. 무당이 하라는 대로 우상숭배 형상인 ‘대감님’을 달래느라 안간힘을 썼다. 처음엔 촛불 몇 개로 시작했지만 점점 많은 돈과 정성을 바쳤다. 그래도 마음은 더욱 허전해지기만 했다.

이처럼 하나님이 아닌 우상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마음을 채우려는 시도는 우리를 더욱 옭아맨다. 술 한잔이 한 병이 되고, 게임 한 판이 밤샘 게임이 된다. 채팅 한 번이 잘못된 만남으로 이어진다. 이런 습관들은 우리 본성에 딱 맞기에 하면 할수록 걷잡을 수 없이 커진다. 죄악의 가는 바늘이 젓가락이 되고 방망이가 되며 결국 바알의 기둥처럼 거대해진다.

그런데 살아나는 것은 의외로 단순하다. 그 성도가 우상에 사로잡혀 고생하던 그때, 친구의 전도를 받은 딸의 손에 이끌려 교회에 나오게 됐다. 처음에 그는 ‘목사님 얼굴이 보이지 않으니 대충 있다 가야지’라며 예배당의 기둥 뒤에 숨어 있었다. 그런데 예배 중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경험하지 못했던 일이라 너무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시끄럽던 마음이 조용해졌다는 것이다. 이처럼 구원은 조건 없이 갑자기 임한다. 그래서 은혜다.

그는 사업장에 숨겨뒀던 대감님을 옮기려고 무당을 불렀다. 그런데 무당이 “교회에서 아멘을 열심히 하나”며 대감님이 따라오지 않는다고 했다. 그는 ‘내가 대감님 모신다고 갖다 바친 돈이 얼마인데 불과 몇 주 교회 갔다고 안 따라온다고? 하나님이 더 세다는 건가’라는 생각에 미련 없이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 돌아왔다.

이때부터 그는 ‘이제 내가 살길은 이 길뿐’이라며 인생의 방향을 바꿨다. 매주 예배를 드리고 소그룹에 참석하며 세례 교육을 받았다. 매일 큐티도 했다. 그러자 남편도 스스로 교회로 나왔다. 그리고 몇 주 전 이 성도는 세례받고 하나님 자녀로 거듭났다. 모든 것이 무너진 듯한 상황에서 예수께 돌이키니 구원이 남은 최고의 인생이 되었다.

성경은 북이스라엘이 망할 때 “오직 유다 지파 외에는 남은 자가 없으니라”고 기록한다.(왕하 17:18) 모두 망하는 사건에서 남은 자 유다 백성이 있었다는 것이다. 이는 그들이 선해서가 아니다. 유다만 남았다는 것은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실 통로는 남았다는 뜻이다. 어디서 무슨 일을 당하더라도 남을 탓하고 원망하기 전에 내가 주님의 말씀을 듣고 죄에서 돌이킨다면 하나님 앞에 남는 구원의 주인공은 바로 나다.

새해 벽두 우리는 나라의 근간이 무너지는 위기에 처했다. 진영이 법 위에 군림하고 있다. 너무 두려운 상황이다. 그러나 이런 엄청난 고난이야말로 “그만 돌이키라”고 외치시는 하나님의 부르심이다. 여기서 예수 그리스도께로 돌이키는 한 사람이 나온다면 그것은 멸망이 아닌 구원의 사건이다. 우리 각자가 그 한 사람이 되기를 기도한다. 우리가 먼저 회개하며 하나님께 돌이킨다면, 우리 가정과 교회와 나라에 오직 구원이 남게 될 것이다.

김양재 우리들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