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권에서 명절은 민심을 모으거나 가늠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여겨져 왔다. 가족 친지가 모이는 자리에서 여러 의견이 나뉘고, 서로에게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전제였을 것이다. 오랜만에 방문한 고향에서 친구나 이웃과 만남도 이뤄지곤 하니, 여러모로 명절은 여론이 형성되는 장이었을 수 있다.
그런데 오랜동안 통용됐던 ‘밥상머리 민심’과 같은 표현은 사실상 힘을 잃었다. 일단 명절 모임이 줄었고, 가족이라 해도 한 밥상에 앉을 사람의 수가 줄었고, 함께 앉았다 한들 공통된 주제로 대화하는 일이 줄었다. 한 식탁에 앉아서도 각자 핸드폰을 보며 각자의 세상에 빠지는 시대다. 더구나 정치 이야기를 식탁에 올리는 건 단순히 싫은 일을 넘어 ‘위험한 일’이 됐다. 지난해 연말 비상계엄 사태를 기점으로 윤석열 대통령 탄핵과 처벌 문제, 부정선거 의혹에 대한 찬반이 견해차라는 단어로 설명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기 때문이다. 한쪽에선 상식인 것이 다른 한쪽에선 거짓뉴스로 받아들여지니 대화를 시작할 접점을 찾기조차 어렵다. 자식이 부모를, 부모가 자식을 설득해보려다 “이번 설에 오지 말라”는 말로 끝났다는 사례가 주변에 숱하다.
비단 가족뿐일까. 그나마 싸움이라도 벌어진 가족은 어쨌거나 관계가 이어진 상태였다는 의미일 수 있다. 양 극단의 대립이 심해지니 아예 대화를 멈추기로 한 단톡방이나 의견이 안 맞는 사람이 조용히 나가주길 바라는 모임들도 많다.
유튜브 알고리듬 등이 만들어낸 ‘같은 편 이야기’만 가득한 세상이 진짜 관계와의 대화를 더욱 단절시키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상대적으로 사회적 관계가 다양하지 않은 노년층과 10대는 극단주의에 쉽게 빠질 가능성이 더 클 수밖에 없다. 같은 편끼리만 이야기하는 세상에서 사회적 연대가 망가지고, 이것이 다시 사람들을 더욱 극단적 사고로 내모는 악순환이 벌어지는 것이다.
신앙 안에서 내밀한 아픔과 고민을 나눌 수 있던 교회 공동체가 대화하기 어려운 공간이 된 것은 그런 의미에서 더욱 아프다. 교회 안에서 다양한 대화가 막히니 위로와 공감이 필요한 이들이 있을 곳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반면 성경적이지 않은 잘못된 주장이 걸러질 기회를 잃고 일부의 지지만을 뒷배 삼아 오히려 설 곳을 찾고 있다.
설 연휴에 부모님 댁으로 이동하던 차 안에서 “왜 믿는 사람들이 더 갈등하고 그렇게 과격한 거냐”는 10대 딸의 질문을 받고 잠시 말문이 막혔다. SNS 탓도, 교육 탓도, 고령화 탓도 해봤지만 믿는 자들의 갈등을 설명하기에는 부족했다. 그러자 아이가 말을 이어갔다. “내 생각엔 다들 자기가 맞다고 확신하면서 잘못된 행동을 하면서도 옳다고 우기는데, 하늘에서 보시는 분이 있다는 걸 잊은 것 같아. 그걸 생각하면 부끄러울 텐데. 하늘의 뜻이 무엇인지 사람이 다 알 수 없는 건데도 자기들이 다 안다고 믿으니 막가는 것 같아.”
공유할 수 있는 대의가 사라진 세상에선 각자 자기가 옳다고 다툰다 쳐도 ‘오직 하나님’이라는 공통의 지향점이 있는 믿는 자들이 왜 더 갈등하는지 답답했는데, 아이의 자답에 무릎을 쳤다. 내가 아는 것이 전부가 아닐 수 있다는 겸손함, 우리가 하나님 큰 뜻을 다 알 수 없는 ‘부족한 존재’라는 깨달음이 회복의 시작이라는 욥의 고백이 떠올랐다. “무지한 말로 이치를 가리는 자가 누구니이까 나는 깨닫지도 못한 일을 말하였고 스스로 알 수도 없고 헤아리기도 어려운 일을 말하였나이다 내가 말하겠사오니 주는 들으시고 내가 주께 묻겠사오니 주여 내게 알게 하옵소서.”(욥 42:3~4)
하나님 앞에 아는 것이 없음을 깨닫는 것이 믿음의 시작이라면 자신이 옳다고 주장하면서 그게 하나님의 뜻이라고 내세우는 건 교만일 것이다. 주님은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고 했다.(약 4:6) 지금 우리가 할 일은 ‘내가 맞다’가 아닌 ‘내가 부족하다’는 자각이 아닐까.
조민영 미션탐사부장 mym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