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윰노트] 내 생의 마지막 노래는

입력 2025-01-31 00:31

사람들에게 기억될 마지막 순간 들려질 노래…
심연의 끝에 다다르는 여정 연상돼

음악 좋아하는 사람들 사이에 유구한 전통을 가진 몇 가지 유희가 있다. 가장 흔한 것이 숫자 매기기다. 수십 년의 전통을 자랑하는 음악 매거진에서 음원 사이트까지 사람들은 갖은 이유로 굳이 음악에 숫자를 매긴 뒤 그를 두고 굳이 기뻐하고 화를 내고 말다툼을 벌인다.

실시간 차트, 주간 차트, 월간 차트에서 역사상 최고의 음반 500장, 최고의 기타리스트 100명, 21세기 최고의 보컬리스트 100명 등등. 혹시 ‘설마 이런 차트나 순위도 있을까?’ 싶어 찾아본 사람이 있다면 아마 깜짝 놀랄 것이다. 이미 세상에는 인간이 상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차트와 순위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원초적 유희라는 단어 말고는 도무지 설명할 수 없는 이 얄궂은 놀이에 정신 팔린 자들이 주인공인 영화가 있다. 2000년 개봉한 영화 ‘사랑도 리콜이 되나요’다. 원제는 ‘하이 피델리티(High Fidelity)’로 역시 영화화돼 큰 인기를 얻은 ‘어바웃 어 보이’ ‘피버 피치’로 유명한 작가 닉 혼비의 원작을 바탕으로 한 작품이다.

이 영화의 주인공 롭과 그의 친구인 딕, 베리는 건수만 생기면 사사건건 베스트 5를 만드는 데 심취한 답 없는 음악 마니아들이다. 월요일 아침에 어울리는 곡 베스트 5, 실연이나 죽음과 관련한 노래 베스트 5 등 무난한 리스트도 있지만 ‘구 여친이 그리울 때 듣는 노래 베스트 5’처럼 웬만큼 가까운 사이가 아니면 섣불리 공유하기 어려운 찌질한 리스트가 핵심이다.

롭과 딕, 베리는 물론 이들과 비슷한 기질을 가진 음악 마니아라면 한 번쯤 그렇게 기필코 겨뤄봤을 거라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리스트 가운데 ‘내 장례식에서 틀 음악’이 있다.

놀이라고 하기엔 너무 무거운 주제 아닌가 싶지만 음악 좋아하는 사람들은 안다. 내가 이 세상에서 기억될 마지막 순간, 나를 대신해 사람들에게 들려질 노래는 내 삶의 충실한 BGM이 되어 준 그 어떤 곡보다 막중한 책임을 짊어진 존재라는 걸 말이다.

자못 진지한 표정으로 이 리스트를 고른 사람 가운데에는 유명인도 더러 있다. 최근 가장 큰 화제를 모은 건 2023년 세상을 떠난 음악가 사카모토 류이치의 장례식 리스트였다. 2014년 인두암, 2021년 직장암을 앓으며 오랜 시간 곁에 죽음을 두고 살아간 그는 살아생전 자신의 마지막을 위한 리스트를 조금씩 다듬어 완성했다. 사후 ‘funeral’이라는 이름으로 세상에 공개된 리스트에는 총 33곡의 노래가 담겨 있었다.

음악은 물론 삶의 궤적까지도 오래 공유한 동료 알바 노토(alva noto)의 곡으로 시작하는 리스트는 미국의 전자음악가 로렐 헤일로(Laurel Halo)의 ‘Breath’로 끝을 맺는다. 화이트 노이즈가 짙은 물안개처럼 낀 모호한 풍경에서 깊고 깊은 심연에 끝내 다다르는 긴 여정을 연상케 하는 엄선된 플레이리스트를 듣고 있으면 언젠가 다가올 끝을 천천히 준비해 온, 평생을 음악과 소리에 둘러싸여 살았던 한 사람의 인생이 무연히 떠오른다.

묵직한 음악가의 리스트 앞에서 말하자니 조금 쑥스럽지만 나에게도 장례식 리스트가 있다. 아직도 한참은 더 다듬어야 할 리스트의 첫 곡만큼은 절대 바뀌지 않을 예정이다.

영국의 신스팝 듀오 펫숍 보이즈(Pet Shop Boys)의 ‘Being Boring’이다. 이 노래에 녹아 있는, 모두에게 환대받지는 못한 시대와 사람과 젊음의 이야기가 전혀 빛바래지 않을 거라는 굳은 믿음이 있다.

저도 모르게 선택과 탈락, 숫자를 부여받는 음악 가운데 오늘은 ‘고향의 봄’이 고민의 핵이다. 대부분 팝과 가요가 자리한 리스트에 조금 뜬금없는 동요지만, 얼마 전(사실 이 글을 쓰고 있는 오늘 아침) 세상을 떠난 외할머니가 봄나물을 뜯으며 종종 콧노래로 부르시던 노래다.

그 소박하고 가느다란 노랫가락과 함께 영원할 것 같던 어느 봄이 여전히 눈앞에 생생하다. 오늘도 음악은 그렇게 쌓여간다.

김윤하 대중음악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