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 백성이 출애굽 후 만난 ‘마라의 쓴 물’(출 15:19~27) 이야기가 있다. 쓴 물을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지만 쓴 물을 마시지 않은 사람 또한 없을 것이다. 쓴 물로 인해 그들은 내면과 신앙이 탈탈 털렸다. 이렇게 형편없고 보잘것없는 인생임을 경험하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엔 쓴소리와 함께 단소리도 있다. 때로는 쓴소리가 약이 되고 득이 되는 것처럼 단소리에 우쭐해 자신을 나락에 떨어지게도 한다. 이미 우리는 어둠과 빛의 공간에 살며 단것과 쓴것을 같이 먹어야 하는 상황에 존재하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이 모두 버릴 게 없음과 이것을 어떻게 받으며 새겨야 하는가에 있다.
한 가지, 한쪽만 얘기하는 교회는 건강하지도 않고 좋은 교회가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신앙에서 창조주 하나님과 오순절 성령의 임재와 역사에 대한 고백 말고는 어떤 것도 절대나 전부가 될 수 없다. 좌와 우를 살피고 앞과 뒤를 보면서 하나님의 뜻을 찾는 것이 신앙의 본질이자 삶이다. 그런 의미에서 단소리와 쓴소리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기도 하다. 물론 하나님은 약자의 편을 드시고 선한 자의 하나님이심을 모르지 않는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죄인을 사랑하는 모두의 하나님이시다.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돌을 던지라’ 하신 말씀처럼 우리는 티끌 같은 차이가 있을 뿐 다르지 않다. 다만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며 온전하신 뜻을 찾아감과 더불어 우리의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주고받는 쓴소리와 단소리에 귀를 막으면 안 된다.
선교보다 중요한 것이 신앙공동체인 교회를 건강하게 세우는 것이며, 어쩌면 그것이 가장 이상적이고 바람직한 선교가 된다. 선교의 궁극적 목적은 하나님 나라의 공동체이기 때문이다. 선교란 단지 교회로의 초청이 아니라 예수를 인격적으로 만나 따르게 하는 신앙의 긴 과정이자 결단이다. 교회에 대한 호감과 신뢰도가 바닥을 치는 상황에서 선교를 말하는 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와 같다.
신앙은 상식적일 수 없다며 이상한 행동과 말을 하는 교인들이 있다. 상식적일 수 없다는 것은 그 이하가 아닌 그 이상이 돼야 한다는 말이다. 하지만 상식 이하와 기본도 제대로 못 갖춘 사람들이 기독교의 이름으로 온갖 못되고 나쁜 일로 물을 흐리고 있다. 무엇이 정의이고 평화이며, 생명과 약자를 사랑하고 위한다는 것인지 고민하지 않고 하나님께 묻지 않는다.
오래전 주보에 ‘목회자의 쓴소리 단소리’ 코너를 만들어 매주 소소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쓴소리를 들으면 기분이 좋지 않고 불편하다. 성도의 비위를 맞추거나 듣기 좋은 말을 하는 곳이 교회일 수 없다. 하나님의 특별하고 귀한 긍정과 사랑을 받은 성도와 교회는 완벽한 게 아니기에 끊임없이 쓴소리를 통해 자신을 살피며 다듬어가야 한다. 세상의 쓴소리와 비기독교인의 비판이나 반응을 무시해선 안 된다.
꿀보다 더 달고 은혜롭다는 설교가 때로는 가장 쓰고 독침 같은 비수가 돼 우리를 무너지게 하고, 목에 넘기는 것도 힘들 만큼 아프고 불편하며 싫은 말이 나를 살리고 바로 세우는 처방이 된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쉽고 편하게 얻는 건 은혜나 축복이 아니다. 고난과 희생의 끝없이 내어줌으로 당신의 뜻을 이루어 가시는 하나님의 역사와 방법을 보면 우리가 얼마나 더 낮아져서 자기를 부인하며 순종해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
반생명으로 치닫는 오늘의 세상에서 그리스도인과 기독교는 생명을 우선하고 택해야 한다. 평화에 반하고 반공동체로 살아가는 온갖 풍조와 문화 속에서 교회는 공동체의 평화와 평화의 공동체를 지향해야 한다. 실족하게 하는 게 있다면 그것을 잘라내고라도 영생에 들어감이 낫다는 말씀을 곱씹어 본다.
백영기 쌍샘자연교회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