꽤 오랜 시간 동안, 같이 밥 먹고 커피 마시고 운동하고 수다 떨고 여행 다니던 사람과 이제는 그 모든 일을 함께하지 않기로 했다. 휴대폰 사진첩에 있던 사진도 모두 지우고, 우리 집에 있던 그 사람의 물건도 깡그리 버렸다. 이별했다는 말이 낯간지러워 괜히 에둘러 말해봤다.
어째서 그렇게 됐는지 이유가 궁금하겠지만 굳이 내 입으로 말하지는 않으련다. 이것은 그를 향한 내 마지막 배려다. 아니, 뭐. 결혼한 사이에서는 이런 상황을 ‘배우자의 유책 사유’라고 말하기도 하던데 이에 해당하는 사유는 여러 가지가 있으니 알아서들 상상하길 바란다. 어쨌건 내 입으로 콕 집어 까발리지는 않았으니 나는 마지막까지 예의를 지켰다고 주장하겠다.
만나고 헤어지는 일이 뭐 그리 별거겠냐만, 마흔이 넘은 나이에 집과 일터만 오가는 내향적인 나에게 이별은 꽤나 큰 타격으로 다가온다. 그 사람과 만나느라 결혼 적령기를 훌쩍 넘겨버린 것은 일도 아니다. 진짜 문제는 대화할 상대가 없어졌다는 점이다.
아침에 일어나 저녁에 눈 감을 때까지 입 밖으로 소리 내서 말하는 문장이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 마시고 갈게요”뿐이라면 믿을 수 있겠는가. 한순간에 사회로부터 고립된 느낌이다. 어떠한 상황을 겪을 때면 그에 해당하는 키워드가 머릿속에 떠오르곤 하는데 이번에는 ‘시련’이라는 단어가 둥 떠올랐다. 신이시여, 도대체 제가 뭘 잘못했기에 이런 시련을 주시나이까. 예?
울적한 기분을 감출 길이 없어 나의 연애사를 속속들이 알고 있는 친구에게 온 마음을 털어놓았다. 내 이야기를 가만히 듣던 친구는 이 시련을 통과하고 나면 더욱 단단한 내가 될 수 있을 거라며 위로를 건넸다. 그 사람보다 훨씬 나은 남자를 만날 수 있을 거라는 덕담도 잊지 않았다.
“그런데 가만, 헤어진 날이 지난주 목요일이라고? 그럼 내 생일에 그런 일이 있었던 거야?” 친구에게 생일 선물로 기프티콘을 보낸 후 그에게 이별을 고한 사실이 떠올랐다. “맞아, 그날이야!” 친구는 매년, 자신의 생일과 나의 이별을 함께 축하하자고 말했다. 이름하여 이별 기념일. 이별을 기념하자는 말이 낯설면서도 재미있게 다가와 실컷 웃었다.
친구에게 속내를 털어놓자 마음이 가벼워졌다. 하지만 친구와 헤어지니 적적함이 나를 내리눌렀다. 한 달에 한 번꼴로 만나는 친구이기에 꼬박 30일을 기다려야 또다시 이야기할 수 있었다. 그동안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잔 마시고 갈게요”라는 말만 반복하며 살아갈 생각을 하니 정신이 아득해졌다.
이러한 번뇌에 사로잡히지 않으려면 새로운 일을 찾아야만 했다. 그때, 이혼한 언니가 한 말이 번뜩 떠올랐다. “돈 벌어서 남한테 쓰지 말고 너한테 써. 자기한테 돈 쓸 때가 제일 짜릿한 거야.” 이별의 최고봉을 경험한 자의 조언이라면 믿고 따를 만했다. 그리하여 얼굴에 난 점이나 뺄까 하고 피부과로 달려갔다.
그렇게 찾은 피부과에서 불빛이 환하게 비추는 기계에 얼굴을 넣고 정면과 좌우를 꼼꼼하게 촬영했다. 모공과 잡티로 가득한 내 얼굴이 모니터에 떠올랐다. 두 개의 사마귀와 수십 개의 점과 수백 개의 잡티에 경악을 금치 못한 것도 잠시. 지난 몇 년간 내 얼굴을 이렇게 자세히 들여다본 일이 있었던가, 하는 데에 생각이 미쳤다.
어디 얼굴뿐일까. 내 마음도, 내 관심도, 내 시간마저도. 온통 남을 향해 있었기에 스스로를 미처 돌보지 못했다. 그동안 세상은 나에게 신호를 보내왔을 것이다. 남이 아니라 나를 바라보라고. 하지만 내가 그 신호를 알아채지 못하니 극약 처방을 내린 것이다. 이제 그만 남과 헤어지고 너를 만나라고 말이다.
“어쩌고저쩌고 레이저 총 10회 정도면 눈에 띄게 좋아질 거예요. 그리고 여기 보시면….” 상담실장은 모니터 속 내 인중을 가리켰다. “이 부분을 제모하면 코밑도 한 톤 밝아질 수 있거든요?” 아아, 정녕 몰랐다. 내 솜털이 김흥국만큼 진했을 줄이야! 제모도 같이하겠다는 나의 말에 상담실장이 계산기를 신나게 두드렸다. 공이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 여섯! 여태껏 나를 위해 이렇게 큰돈을 써본 일은 없었기에 모골이 송연해졌다.
언니가 말한 짜릿함이 바로 이것이었을까. 하지만 세상이 주는 깨달음을 이대로 흘려보낼 수는 없었다. 신용카드를 꺼내 들었다. “할부 필요하실까요?” “아뇨. 일시불로 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