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브리어 성경에는 미래에 일어날 일을 과거에 일어난 일처럼 말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이러한 문법을 가리켜 ‘예언적 완료 시제’라고 합니다. 장차 일어날 일이 너무 확실하므로 아예 이미 일어난 것처럼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가장 극적인 실례로는 이사야 53장에서 설명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일 것입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사 53:4~5)
BC 740년 기록된 말씀이지만 예수님의 고난이 이미 일어난 사실처럼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까. 또한 그의 고난으로 인해 우리가 엄청난 혜택을 이미 누리게 되었다고 설명하지 않습니까.
이러한 예언적 완료 시제는 예수님의 탄생에 대한 예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의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시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 9:6) 700년 후에 태어날 한 아기를 가리켜 이미 우리에게 주어진 왕이라고 설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경의 표현은 우리에게 새로운 역사관을 갖게 합니다. 역사란 단순히 과거에서 현재로 이어지는 교훈만이 아니라 미래와 오늘을 잇는 역할도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장차 일어날 하나님의 약속으로 오늘을 살아내라는 권면이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메시아를 기다리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기다림은 가만히 앉아 시간이 지나기를 바라는 수동적인 기다림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이미 이뤄진 것과 같은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고 오늘을 담대히 살아냈던 자들입니다. 구약시대 믿음의 선진들에 대하여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이 믿음의 사람들은, 약속된 것을 아직 손에 넣지 못했지만 믿음으로 살다가 죽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습니까. 그들은 약속된 것을 멀리서 바라보며 반겼고, 자신들이 이 세상에 잠시 머물다 가는 나그네임을 인정했습니다.”(히 11:13, 메시지성경)
‘아직 손에 넣지 못한 약속’이란 자신의 때에 실제화되지 않은 약속이었음을 뜻합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 약속을 멀리서 바라보며 반겼던 자들이었습니다. 비록 자신의 때에 실제를 볼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살아있는 약속이라고 믿었던 자들입니다. 또한 그들은 스스로 세상에 잠시 살다 가는 나그네임을 인정하며 살았습니다. 나그네이기에 세상에 사는 동안 모든 것을 보아야만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도리어 하나님의 때를 기다리면서 지연된 약속이라도 실제의 약속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입니다.
약속하신 우리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그는 때가 차매 약속하신 자신의 독생자를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않고 우리 모든 사람에게 내어주신 것이라면 그와 함께 우리를 위해 모든 것을 주신 것이나 다름이 없지 않겠습니까. 그러니 하나님을 신뢰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의 약속을 신뢰해야 합니다. 그 약속이 내일 이뤄지든 아니면 700년 후에 이뤄지든, 우리는 여전히 그 약속의 실제 안에서 오늘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믿음으로 승리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