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때
나무가 두 팔 벌리고
바람을 끌어모으며 살고 있다
생각했지만
이제는 땅속에 머리를 박고
두 다리를 쳐들고 서 있다
생각하기로 했다
나무는
물구나무서서
손가락으로 대지를 움켜 채고
끌어당기며
중력의 법칙을 지킬 것인가
말 것인가
궁리하는 자세로
아랫도리를 허옇게 벗고서
머리카락으로 흙알 하나하나를 휘감으며
하늘을 딛고 서 있다
새들은
나무의 사타구니에
집을 짓고 노래한다
나무들이 밤마다 짝을 찾아
돌아다녔다는 전설을 상상하며
그 간사한 주둥이로
욕망은 즐겁다
욕망을 즐겁다, 라고
-진수미 시집 '고양이가 키보드를 밟고 지나간 뒤'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