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룸에서] 이대로면 4류도 과분하다

입력 2025-01-27 00:33

지난달 한덕수 국무총리 탄핵소추안 가결 소식을 전하는 미국 ABC 방송 앵커는 숨 가빠 보였다. 윤석열 대통령의 12·3 비상계엄, 대통령 탄핵소추안 가결, 한 총리의 대통령 권한대행, 한 총리 탄핵소추안 가결, 최상목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의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이어지는 사건을 나열하고선 이렇게 말했다. “이 모든 걸 잘 따라오셨나요? 모든 게 한 달도 안 돼 일어난 일입니다.” 그는 이 문장을 말하며 중간에 헛웃음을 짓기도 했다.

전례 없는 정치의 불확실성은 한국을 보는 외부의 시선을 바꾸고 있다.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는 지난 16일 올해 첫 통화정책방향회의(통방) 후 기자간담회에서 이에 대해 언급했다. 그에 따르면 비상계엄 후 해외 문의가 왔을 때 아이러니하게 지난 두 번의 탄핵 경험이 “설명하기 편한 툴”이 됐다고 한다. 탄핵 사태에도 경제 프로세스가 정치와 별개로 진행돼 충격이 제한됐던 경험을 해외 언론 및 신용평가사에 전했고, 그 결과 충격은 있어도 관리가 되는 상태가 돼서 다행이라고 여겼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 총리 탄핵, 윤 대통령 체포영장 집행 관련 뉴스가 나간 후 분위기가 달라졌다는 게 이 총재 설명이다. “지난번에 얘기했듯이 정치와 경제가 분리돼 잘 간다고 그러는데 이제 안 되는 것 아니냐, 정치 프로세스가 어려워지는 것 아니냐는 질문이 매번 와서 사실은 대답하기가 굉장히 곤란했습니다. 왜냐하면 과거와 같다는 얘기를 하기가 어려운 상황으로 들어가서요.”

이 총재 말처럼 현 상황은 전례 없음의 반복이다. 통방 이후인 18~19일엔 서울서부지법 폭력 사태가 발생했다. 분노에 휩싸여 법원 건물을 부수고, 판사를 찾아 나서는 이들을 지켜본 해외 언론은 한국의 정치적 위기가 심화되는 상황을 실시간으로 전 세계에 전했다. 드러난 환부가 치료·봉합되지 못하고 계속 벌어지고 있지만 정치의 역할은 눈에 띄지 않는다. 되레 혼란을 부추기는 모습도 보인다. 가장 큰 책임은 체포영장에 저항하며 법치에 대한 신뢰를 깎고, 계엄령을 계몽령이란 궤변으로 치장하는 윤 대통령과 그 주변에 있지만 여당도 책임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법원 폭력을 두고 성난 민심이라거나 ‘백골단’ 국회 기자회견, 극우 유튜버 설 선물 등의 논란을 불러놓고 “폭력은 정당화되지 않는다”고 해봐야 얼마나 진정성을 가질 수 있겠는가.

더욱이 정치가 본연의 자리에서 문제 해결에 집중하기보다 주변 단속에 치중한다는 인상이 강하다. 더불어민주당은 ‘카톡 검열’ 논란을 부르더니 최근엔 여론조사 업체 관리를 강화하는 법률 개정안을 발의했다. 지난 20일 이재명 민주당 대표가 6대 은행장과 만난 자리에선 ‘은행장 줄세우기 논란’에 이어 특정 매체 광고 압박 논란까지 불거졌다. 해당 매체가 신빙성 낮은 기사를 생산하는 것과 별개로 “지금은 내란 소요 사태 극복에 중점을 둬야 할 시기”라던 이 대표가 불필요한 논란을 더한 셈이 됐다.

여당도 다르지 않다. 권성동 원내대표를 비롯한 국민의힘 의원들은 지난 22일 한국은행을 찾아 이 총재의 추가경정예산 관련 발언 배경을 묻고 ‘총재가 정치 생각 있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을 나타냈다고 한다. 현 사태의 책임을 나눠야 할 이들이 사태가 마무리되지도 않았는데 한은 총재에게 정치할 생각 있냐고 따지는 장면을 국민은 어떻게 바라볼까.

비상계엄 국면에서 자주 회자되는 게 고(故)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30년 전 ‘기업은 2류, 관료는 3류, 정치는 4류’ 발언이다. 비상계엄 사태와 이를 수습하는 정치에 절망하는 이들이 그만큼 많다는 의미일 것이다. 이대로라면 4류도 과분하다.

김현길 경제부 차장 hg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