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풀꽃 시인’ 나태주(80)는 대표작 ‘풀꽃’의 마지막 문장인 “너도 그렇다”를 “내게 구원을 준 문장”으로 꼽는다. 나뿐만 아닌 타인도 “자세히 보면 예쁘고 오래 보면 사랑스러운” 존재임을 일깨우는 이 문장이 “내가 아닌 그 어떤 신비한 존재가 쓰라고 종용해 받아 쓴 문장”이라는 이유다.
그의 신간 ‘사랑에 답함’(위더북)은 이처럼 사유의 확장으로 자신을 넘어선 시인의 경험이 여럿 담긴 책이다. ‘사랑’을 주제로 인생을 풀어낸 이 사색집에는 그의 신앙생활에 관한 이야기도 수록됐다. 시인을 지난 22일 이메일로 만났다.
-지금까진 신앙 에세이만은 고사했는데요.
“저는 2007년 죽을병에 걸려 6개월 동안 치열하게 투병하다 구사일생으로 세상 빛을 다시 본 사람입니다. 이후 신앙 에세이 출간 제의도 받았지만 ‘이건 아니다’ 싶었지요. 이번에도 처음엔 거절 비슷하게도 했지만 종교 문제로만 채우지 않아도 좋다고 해 사랑에 집중해 글을 썼습니다. 제게 이번 책이 매우 어려웠던 이유입니다.”
-투병 생활 중 특별한 체험도 하셨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참 신비하고 놀라운 일입니다. 각도기를 세운 듯 둥그스름한 동굴 모양에서 나오는 희미한 빛과 아들이 부르는 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돌아온 일, 스르르 허공으로 올라가던 삼베 빛깔 손수건과 병실 천정에 생긴 청옥빛 우물 형태…. 맨정신에 겪은, 오늘 와서도 선명한 기억입니다.
놀라운 건 이튿날 ‘병세가 호전되니 예전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 같다’는 담당의의 말이었습니다. ‘내 몸에 기적이 통과했구나’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체험 이후 하나님의 존재를 믿으셨습니다.
“나는 매우 부족한 사람이지만 하나님의 사랑이 무한대라는 걸 믿습니다. 한 인간이 하나님을 모를 때도 하나님은 그를 사랑합니다. 심지어 고개를 돌리고 있어도 그를 사랑하는 게 하나님입니다.
중학교 2학년 때 오른쪽 눈알이 빠지는 사고를 당했을 때 하나님은 나를 살려줬습니다. 베트남 파병 시절에도 보살펴 줬습니다. 그 뒤로도 크고 작은 위기마다 건져줬습니다. 2007년 힘겹게 앓고 나서 2년 뒤 수술을 받아야 할 때도 그랬습니다. 첫 수술이 잘못돼 다음 날 재수술을 받고 기적처럼 소생했습니다. 우주 어느 곳에 있는 하나님의 능력이 내게 임했다고 생각합니다.”
-선생의 시어는 평범하면서도 마음을 움직이는 무언가가 있습니다.
“‘시의 첫 문장은 신이 주는 선물’이란 말이 있습니다. 나는 여기에 나름의 주장을 보탭니다. ‘시의 끝 문장이야말로 신이 준 선물이다.’ 인생도 시도 그렇지만 예술작품의 성장·진행 과정은 반복과 병치로 이어집니다. 그러다 후반부에서 반전, 변용을 일으킵니다.
‘풀꽃’ 시의 마지막 문장 ‘너도 그렇다’가 반전과 변용을 이룩한 문장입니다. 이런 시는 모든 이에게 가 닿고 영원의 문장으로 남으며 민요의 경지에 이릅니다. 내 또 다른 시 ‘멀리서 빈다’의 마지막 문장인 ‘가을이다, 부디 아프지 마라’ 역시 신이 준 문장이라고 생각합니다.”
-올해가 등단 55주년입니다.
“이제는 신체와 마음의 노쇠를 실감합니다. 만으로 80세니까요. 오는 4월 개관하는 ‘나태주풀꽃문학관’ 완공이 가장 큰 과업입니다. 올해 53권째 신작 시집 원고를 마쳤는데 앞으로 몇 권의 시집을 더 쓸지 궁금하기도 하고 걱정스럽기도 합니다.”
-불안정한 상황으로 불안을 호소하는 이들이 늘었습니다.
“재독 철학자 한병철은 저서 ‘피로 사회’를 낸 지 10년 만에 ‘불안 사회’를 냈습니다. 우리만 아니라 지구촌 전체가 그렇다는 겁니다. 한국의 작금 형편은 말할 것도 없지요. 불안하고 피로하다 못해 두렵기까지 합니다. 누가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정치인이지요. 우리 국민도 정치엔 관심을 조금 줄이면서 자신을 응시하는 삶을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희망이란 오늘보단 내일을 믿고 발돋움하는 마음입니다. 오늘은 어둡고 불안하며 지루하고 피곤하더라도 희망의 등불을 가슴에서 지우지 말길 바랍니다. ‘겨울이 오면 봄도 멀지 않으리.’ 영국 시인 퍼시 비시 셸리의 작품 ‘서풍부’ 마지막 구절입니다.”
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