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치, 강남스타일, BTS, 영화 기생충 등 일과성 이벤트들에 머물렀던 세계의 관심이 이제 한국문화 전반으로 확대되고 있다. K컬처로 대변되는 국내외의 다양한 사회현상들, 그리고 그들의 명과 암을 사회과학적으로 관찰하고 반추해 봄으로써 한국문화의 본성을 재조명해본다.
이젠 억울하기까지 하다. 매년 하는 소득공제지만 너무하단 생각이 든다. 버는 족족 따박따박 원천징수가 이루어진다. 직장인 봉급이 유리알 지갑이란 말이 이해가 간다. 그럼에도 외국인인 필자에게 돌아오는 세제 혜택이나 공제는 지나치게 박하다. 해외에서 생활하는 아이들의 교육비나 생활비, 의료비 등은 그렇다 치자. 거기서의 소비가 한국경제에 기여하는 바를 셈하기 어려울 테니 이해한다. 하지만 필자가 매달 지불하는 월세에 대한 소득공제 혜택은 왜 내국인에게만 부여되는지 모를 일이다. 양육비나 청약저축, 국민연금, 주택소유에 대한 과세혜택이나 소득공제도 마찬가지다. 단언컨대, 우리 회사에서 나와 같은 수준의 급여를 받는 내국인 동료들의 실제 수입은 필자보다 높을 것이다. 판이 그렇게 짜여있다. 물론 세금이나 외국인 정책 전문가 나리들이 나름의 이유로 세법을 이리 차등적용하였겠으나 나 같은 일반 외국인 납세자들은 기가 찰 노릇이다. 최소 필자가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누군가 월세를 깎아준 기억은 나지 않는다. 월세액 공제가 국적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렇다. 당신과 같은 직장에서 같은 업무를 담당하고 있는 외국인이 실제 가족의 품에 안겨다 주는 돈봉투는 필시 당신의 그것보다 얇다. 물론 환율이나 자국의 물가를 따져보면 그것이 여전히 자국에서는 더 큰 경제적 가치일 수 있다. 그럼에도 이러한 논리는 개인의 능력이 아닌 국적에 따른 임금의 불평등을 정당화할 수 없다. ‘동일노동 동일임금’에 대한 공방은 여전히 양성평등의 장(場)에만 머물러 있다. 외국인은 아직 이 토론의 링에 제대로 올라와보지도 못했다. 이는 비단 한국만의 문제는 아니다. 미국을 포함한 여러 선진국에서도 외국인에 대한 차별적 세제를 적용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필자 역시 미국에서 영주권을 취득하기 전까지 ‘비거주 외국인’으로 분류되어 누리지 못한 세제혜택이 적지 않았다.
외국인을 위한 세제개편을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그저 그들도 당신과 같은 평범한 납세자임을, 심지어 ‘더 내고 덜 받아 가는 이들’임을 알아주었으면 한다. 뻔한 이야기를 참 길게도 한다 생각하는 독자도 있겠으나, 필자가 경험한 한국인의 인식과 감정은 이와 거리가 아주 멀다. 특히 필자와 같은 ‘검은 머리 외국인’은 한국의 교육이나 복지 서비스 등 여러 혜택을 알뜰히 챙기면서도 세금은 미국에만 납부하는 기회주의자로 비치는 경우가 많다. 세계 최강의 한국 건강보험 이야기가 나오면 반응은 더 거칠어진다. 보험료는 내지도 않으면서 미국에 있는 가족까지 피부양자로 올려 한국인 납세자의 혈세를 축내는 약탈자로 보기도 한다. 그나마 20대때 육군병장 만기 전역을 했기에 망정이지, 어떤 이유에서든 병역면제까지 받았다면 나를 사람 취급이라도 할까. 이 위의 몇 문장은 사실 여러 번의 필터링을 거쳐 최대한 순화한 결과임을 일러둔다.
억울함을 달랠 겸 내 얘기를 먼저 마무리 짓자. 소득세 정산은 양쪽에서 모두 이루어진다. 우선 세율이 상대적으로 낮은 한국 국세청에 한번. 한국에서 원천징수된 세금을 차감한 나머지 소득에 대해 미국 IRS(Internal Revenue Service)에 한 번 더. 그나마 한국 국세청의 슈퍼컴퓨터가 필자의 소득이나 씀씀이에 대해 너무도 속속들이 잘 알고 있어 서류준비에는 삼십분이 채 걸리지 않는다. 다만 코앞에서 현실판 빅브라더를 마주하는 듯한 오싹함은 쉬이 가시지 않는다. 미국 서류는 약 40불 정도를 주고 봉급명세서, 주택융자금, 재산세 등 기본정보를 바탕으로 소득세 정산을 처리해 주는 소프트웨어를 구매해 작성한다. 매해 세법이 조금씩 바뀌기 때문에 마무리하는데 반나절 정도 걸린다. 연방정부와 주(州)정부에 서류를 따로 작성해 제출해야 하는데, 주정부에 제출하는 서류를 온라인으로 보내려면 20불 정도를 추가로 지불해야 한다. 단돈 백불이라도 도로 뱉어내야 할 때는 짜증이 더한 이유다.
건강보험료는 매달 잘도 빠져나가건만 내게 혜택이 되는지는 의문이다. 미국에 있는 처와 아이들이 피부양자로 올라와 있긴 하지만 여름방학을 제외하면 이들이 한국에서 병원에 갈 일은 없다. 필자도 웬만해선 병원을 잘 찾지 않는 스타일. 오히려 아이들과 처를 위해서는 미국 현지 보험을 따로 장만해야 한다. 커버해주는 진료과목이나 자기부담금(deductible)에 따라 프리미엄이 천차만별이지만 가장 저렴한 것도 월 천불을 훌쩍 넘는다. 아이들의 학비와 재료비, 수영클럽 회원비, 지역 오케스트라 멤버십 모두 나름 뭉칫돈이 들어가지만, 한국에서 근로소득이 있다고하여 공제항목에 넣어주지 않는다. 단지 내가 외국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필자 개인의 사정이니 일반화하는 데에는 물론 한계가 있을테다. 체류신분이나 업종, 국적에 따라 셈이 달라질 수도 있고, 실제 주위에서 의심하는 것처럼 법망을 피해 세금을 회피하거나 부정한 방법으로 복지혜택을 누리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현재의 사법 시스템이 제대로 작동하고 있다면, 한국에서 일하고 있는 대다수의 외국인은 여느 한국인과 다를 것 없는 성실한 납세자로 보아야 맞다. 이상한 점은 우리가 이러한 사실을 꾸준히 간과해 왔다는 것이다. 특히 살림살이가 어려울수록 자신이 처한 상황을 특정 집단의 탓으로 돌리기도 하는데, 이때 희생양으로 자주 사용되는 것이 사회적 기반이 취약한 외국인이다. 본래 살기 좋던 우리나라에 ‘그들’이 들어와 ‘일자리를 모두 가져갔다’거나 ‘범죄와 전염병이 늘었다’와 같은 태도를 취함으로써 개인의 무능이나 불성실함으로 인한 불행을 설명하려 하는 경향은 늘 있어왔다.
19세기 말(1870-1910) 미국 시카고에서 유독 자주 발생하던,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조금 기이하게 느껴질 수 있는, 배우자 살인사건에 대한 미디어의 보도 태도도 그러했다. 필자가 당시 시카고 경찰서 데이터를 분석해 본 결과 배우자를 살인할 확률은 정착민(미국에 조금 먼저 도착한 ‘선배 이민자’)과 이민자간 별 차이는 없었다. 하지만 당시 신문지면에 나타난 배우자 살인사건은 주로 이민가정에서 발생한 것들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마치 이 해괴한 사건들이 주로 이민가정에만 집중되어 있다는 착각이 들 정도다. 취지는 명확하다. 이민자 집단을 ‘그들(others)’로 악마시하여 분리시킴으로써 기존 사회질서의 온전함을 재확인하고 정착민들간의 유대를 강화하는 것. 회사나 정부에서 문제가 되거나 ‘그럴 것으로 추정되는’ 개인의 퇴사나 사임을 통해 대중에게 조직의 자정(自淨)능력이나 무결함을 입증하는 관례와 유사한 논리다.
정확히 1년 전 필자는 본 지면에서 정부의 출산 장려 정책으로는 한국의 저출산 문제를 해결하기 어렵다 적시한 바 있다. 새해 벽두부터 외국인의 한국살이에 대해 재론하는 이유는 필자가 체계적이고 질서정연한 이민정책에서 그 돌파구를 찾고 있기 때문이다. 정책이 실효를 거두기 위해서는 이에 걸맞은 사회문화적 공기가 먼저 조성되어야 한다. 잘 반죽된 쿠키 도우도 처음부터 차가운 오븐에 들어가 급히 데워지면 ‘겉바속촉’은 기대하기 어렵다. 제대로 된 요리를 맛보기 위해서는 오븐이 적정 온도에 오를 때까지 우선 기다려야 한다.
이민자에 대한 한국의 온도는 냉랭함을 지나 싸늘하기까지 하다. 지난해 한 공영방송사에서 2024년 현재까지 약 927만여 명의 난민을 수용한 독일의 후기를 다큐멘터리로 전한 적이 있다. 독일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한 난민 출신자의 일상과 독일의 이민정책 전문가 인터뷰가 이어진다. 언어와 직업교육을 받은 이들이 늙어가는 독일 엔지니어의 기술을 전수받아 청년들의 기피로 줄어든 필수 산업영역의 인력풀을 회복하고, 거시적으로 이들의 자녀들이 얄팍해진 인구피라미드의 저층을 채워 독일의 인구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 골자다. 물론 제작자의 희망이 가미된 현실의 단편이긴 하지만 한국에서 시도해 봄 직한 아이디어들이 꽤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시청자들의 의견은 달랐다. “시청료 분리징수부터 시작하자”를 필두로, 유럽의 실패 사례들을 나열하며 난민뿐만 아니라 이민자 수용 전반에 대해서도 거센 저항감과 우려를 드러내는 댓글이 끊이지 않았다.
지역마다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국내 다문화 가정은 이미 전체의 약 10%에 육박하고 있다. 외국인과의 혼인이 농어촌에 주로 편중되어 있을 거라 짐작하겠지만 서울도 9%를 넘긴 지 오래. 이민자와의 공생은 우리 사회 일부에 먼저 도착한 미래다. 이민에 대한 한국사회의 온도를 조금이라도 높여야하는 이유다. ‘그들’을 ‘우리’로 이해하고 함께 거센 비를 피할 수 있는 ‘정체성의 우산(superordinate identity)’을 찾는 것부터 시작해보자. 대부분의 외국인 노동자들이 사실 우리와 같은 평범한 납세자임을 상기시키는 것도 작지만 도움이 될 것이다. 서로 너무도 같아 ‘다름’에 극도로 민감한 우리의 현실을 생각해 보면 이러한 생각이 다소 나이브해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성공 확률이 그리 낮지만도 않다. 새로운 사회의식의 확산은 땅덩이가 작을수록, 또 그 위에 공존하는 이들 사이에 동질성이 높을수록 빠르고 강하게 일어난다. 한국이 꼭 그렇다.
겸 한국문화데이터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