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고 침침했던 겨울을 보내면서 맞는 설이다. 엊그제부턴 제주 날씨도 따뜻해져 두꺼운 패딩을 벗고 조금 가벼워진 채로 출근했다. 설이 지나면 곧바로 24절기 중 첫 절기인 입춘이다. 이번만큼 ‘봄’을 간절히 기다린 적이 또 있을까. 봄을 앞두고 섬은 더할 나위 없이 분주해진다. 신구간을 맞기 때문이다.
신구간은 거의 제주에만 있는 특별한 풍습이다. 보통 대한 후 5일부터 입춘 전 3일까지 일주일 정도를 말하는데, 제주의 독특한 민속과 관련돼 있어 외지에서 온 사람들은 무척 낯설어 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제주 사람들은 이때에 맞춰 평소 조심스러웠던 이사, 집수리, 묘지 손질, 대청소 등을 부리나케 한다. 요즘에야 조금 덜해졌으나, 내가 처음 제주에 내려왔던 10여년 전만 해도 제주 사람들은 꼭 신구간을 지켜 이사를 하거나 집을 고쳤다. 신구간에는 제주 안에서 영업하는 업체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어 전국 이삿짐센터들이 몽땅 제주로 모인다는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모두가 신구간에 맞춰 이사를 하다 보니 오히려 신구간에는 집을 구하기도, 이사를 하기도 쉽지 않다. 시내 전자제품 센터나 가구점은 신구간을 앞두고 대대적인 프로모션을 진행한다.
사실 신구간에 이사를 한다는 것은 단순히 오래된 풍습일 뿐 아니라 나름 과학적인 이유도 있다. 바쁜 농사철이 모두 지난 농한기에 미뤄뒀던 집안일을 한다는 뜻도 담겼겠지만 무엇보다 늘 따뜻한 제주가 이 시기만큼은 기온이 뚝 떨어진다는 점이 중요하다. 기온이 낮기 때문에 세균 번식이 활발하지 않아 화장실이나 집을 수리해도 문제가 없고, 온갖 유산균이 자라는 장독을 옮겨도 되는 때라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이사나 집수리를 하면 안 된다고 여겨지는 때도 있다. 제주에는 ‘오뉴월에는 앉은 자리의 방석도 옮기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다. 제주에선 가장 습하고 더운 시기엔 큰일을 벌이지 말란 뜻이다. 세균이 쉽게 번식하고, 혹여 더운 날 힘을 쓰면 탈이 날까 싶었던 조상들의 지혜다.
입춘 날이 되면 제주 사람들은 재미 삼아 보리밭에서 보리를 뽑아 그 뿌리로 한 해 농사를 예상해 보기도 한다. 쑥 뽑았는데 보리 뿌리가 하나면 그 해는 가뭄이 들 것이라 했고 뿌리가 두 개면 비가 적당히 내려 풍년이 될 것을 기뻐했단다. 아마 농부들이 뽑은 보리 뿌리는 대부분 두 개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보리를 뽑아보는 것과 함께 이맘때 제주에선 앞바다 어디쯤의 섬에서 찾아온다는 ‘영등할망’을 환영하는 여러 행사를 연다.
제주 설화에서 ‘바람’과 ‘풍요’를 담당하는 ‘영등할망’은 매년 음력 2월이면 제주를 찾아 바다와 땅에 씨앗을 뿌린다. 2월 초하루에 한림으로 들어와 보름이 지나면 우도를 통해 제주를 떠난다는 구체적인 루트도 보유했다. 바람이 많은 제주에서도 가장 날씨가 사나운 이 시기 어부와 해녀들은 배를 타거나 물질에 나서지 않고 바다가 내어주는 풍요와 안녕을 기원한다. 기분 좋은 바람과 함께 바다 건너 가장 먼저 제주를 찾는 봄을 반갑게 맞아보자. 우리의 봄은 곧 온다.
고선영 콘텐츠그룹 재주상회 대표
고선영 콘텐츠그룹 재주상회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