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최경주 (39) 담배 유혹에 빠져 다시 흡연… 국내 대회 예선전서 탈락

입력 2025-01-24 03:04
최경주 장로가 2012년 제주 핀크스골프장에서 열린 SK텔레콤 오픈에서 경기를 마치고 인터뷰 하고 있다. 뉴시스

2001년 초 미국 애리조나주에서 열리는 투산 오픈에 참가하러 가던 중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LA)에 잠시 들렀다. 식당에 차를 세우자마자 담배부터 꺼내 물었다. 담배를 깊이 들이마시고 내쉬는데 옆에 있던 지인이 한마디 건넸다. “최 프로, 그 담배 끊었으면 30야드(약 27m)는 더 나갈 거야.” 웃으며 넘겼지만 속으로는 ‘담배를 끊으면 뭐 얼마나 더 나간다고’ 생각하며 콧방귀를 뀌었다.

몇 시간 뒤 대회장에 도착해 몸을 풀고 연습 그린으로 향하면서 담배를 입에 물었다. 200m 정도 되는 길목에 수많은 갤러리가 서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그 순간 어디선가 “케이제이(KJ) 이리 좀 와봐”라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리자 일흔이 넘어 보이는, 백발이 성성한 백인 할아버지가 나를 부르고 있었다. 클럽하우스 앞에서 그림을 파는 화가였다.

가까이 다가가자 할아버지는 자신이 벽에 붙인 사진을 손으로 가리켰다. 세계 3대 골퍼인 잭 니클라우스, 아널드 파머, 개리 플레이어가 마스터스 연습 라운드 때 티 박스에 서 있는 모습을 찍은 유명한 사진이었다. 세 선수의 입에는 담배가 물려 있었다. “60년대에는 선수들이 담배를 많이 피웠어. 근데 요즘은 안 피워. 이제는 안 피운다고. 무슨 말인지 알겠나.”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네” 하고 대답한 뒤 그린을 향해 발길을 옮겼다. 할아버지의 말이 귀에 꽂혔다.

톱 랭커들이 담배를 안 피우는 데는 뭔가 이유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어 금연하기로 했다. 담뱃갑과 재떨이를 쓰레기통에 넣고 봉투를 묶어 호텔 밖 쓰레기장에 던졌다. 나는 하루에 두세 갑씩 피우는 중독자였다. 아내는 해마다 하루에 피우는 담배를 열 개비씩만 줄여 보라고 간절히 부탁했다. 금연을 결심한 날은 공교롭게도 아내의 생일 이틀 전이었다. 나는 담배 대신 금연 껌을 씹었다.

3개월 후인 2001년 5월 ‘SK텔레콤 오픈’에 출전하기 위해 귀국했다. 오랜만에 맡는 담배 연기 때문에 정신이 아찔해졌다. “그래. 이번에만 피우고 미국에 돌아가면 다시 끊는 거야.” 호텔 방에서 담배를 물었다. 재떨이에 꽁초가 쌓일 때까지 피우고 또 피웠다.

다음 날 아침에 눈을 떴더니 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대회 결과는 절망적이었다. 컷 통과에 실패한 것이다. 미국 PGA 투어 선수가 국내 대회 예선전에서 탈락하다니. 주최 측인 SK텔레콤 관계자들과 팬들에게 부끄러워 얼굴을 들 수 없었다.

“담배를 괜히 피웠다.”

후회가 밀려왔다. 다시는 담배를 입에 물지 않겠다고 굳게 다짐했다. 이후에도 몇 번 유혹의 고비가 있었지만 끝내 자신과의 약속을 지켜냈다. SK텔레콤 오픈 이후 24년간 단 한 번도 담배를 입에 물지 않았다. 금연은 자신과의 싸움이다. 싸움에서 이기는 순간 건강과 시간의 자유, 성취감,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소중한 것들을 얻을 수 있었다.

정리=유경진 기자 yk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