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시각] 자본의 국적

입력 2025-01-23 00:38 수정 2025-01-23 16:15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취임식에 대한 언론과 여론의 평가는 대체로 비슷하다. “한 편의 쇼 같았다”는 촌평이 미국뿐 아니라 우리나라 언론 등에서도 쏟아졌다. ‘쇼’라는 것은 대체로 흥겹고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무언가가 있기 마련이다. 하는 이들은 물론이거니와 보는 이들에게도 그렇다. 그러나 이번 트럼프의 취임식 쇼는 보는 이들의 마음을 여러모로 착잡하게 했다. 트럼프가 또다시 ‘마가’(MAGA·Make America Great Again)를 앞세워 백악관에 입성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뜻밖의 변수’가 상수로 작동할 트럼프 2기는 어떤 모습일지 예측조차 힘들다.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는 그의 ‘행정명령 서명 쇼’에서 선명하게 드러났다. 취임식 직후 트럼프가 백악관보다 먼저 찾아간 곳은 ‘캐피털 원 아레나’였다. 지지자를 포함해 2만여명이 몰린 곳에서 그는 첫 행정명령에 사인을 하고 지지자들에게 ‘펜을 던졌다’. 트럼프 취임식 쇼 가운데 개인적으로 가장 눈길을 끌던 장면이었다. 미국에서 대통령은 대체로 문서 하나에 펜 하나를 쓰고, 서명한 펜은 주변에 나눠준다고 한다. 뒤에서 일한 이들의 공헌을 인정하는 방식의 하나다. 최종 서명자는 대통령이고 그가 언제나 가장 주목받지만, 역사적인 순간을 장식한 펜을 나누면서 공로도 함께 가져간다는 의미다. 트럼프는 첫 행정서명의 펜을 지지자들에게, 시원시원하게 던져서 건넸다. 마가 지지자들과 공로를 나누겠다는 메시지가 읽힌다.

한국의 수출기업들은 트럼프 행정부가 어떤 결정을 내릴 것인지 살피며 대책 마련에 분주하다. 여러 대응 시나리오를 준비하고 있을 것이다. 구체적인 내용은 알기 어렵지만 ‘미국에 돈을 가져다줄 것’이라는 정도는 쉽게 관측된다. 투자가 됐든, 관세가 됐든, 현지 고용이 됐든 말이다. 트럼프 행정부는 이 ‘한국발 자금’에 대해 어떻게 판단할까. 한국의 자본이 미국에 왔다고 생각할지, 미국이 응당 받아야 할 돈을 받아냈다고 볼 것인지 정확히는 알 수 없다. 다만 우리나라 입장에서는 국내로 들어올 투자금이 해외로 간 것으로 볼 수 있겠다. 국내 투자가 줄어들 가능성, 국내 기업의 수익성 악화 우려가 제기된다.

이런 가운데 ‘중국 자본’에 대한 사회적 반감은 흥미롭다. 신세계그룹이 지난해 말 중국 알리바바인터내셔널과 합작 법인을 세우고 협업하겠다고 공언했을 때 “반중 감정은 어쩌고 중국과 손을 잡느냐”는 비판이 있었다. 정용진 신세계그룹 회장이 자신의 인스타그램에 수차례 언급한 ‘멸공’ 논란 때문에 더해진 측면도 있다. 최근에는 홍콩계 사모펀드가 ‘중국 자본 음모론’의 중심에 선 적이 있다. 사모펀드(PEF) 운용사 어피니티에쿼티파트너스가 롯데렌탈 지분을 인수한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중국산 전기차로 한국 시장을 공략하려는 포석이 깔렸다는 소문이 돌았다. 어피니티는 급기야 보도자료를 내고 “우리는 글로벌 사모펀드다. 파트너 중 중국 국적자도 없다”고 해명했다. 이럴 일인가 싶지만 반중 감정이 그만큼 크다는 방증이기도 할 것이다.

반일 불매운동이 한창이던 2010년대 후반, 쿠팡이 손정의 비전펀드로부터 대규모 투자금을 유치했다는 점에서 표적이 된 적이 있다. 당시 항간에 떠도는 이야기 중에는 이런 게 있었다. “굳이 따지자면 쿠팡은 중동 기업이다.” 손정의 비전펀드가 유치한 자금에는 오일머니 비중이 가장 높았기 때문이다. 이제 쿠팡은 미국 기업이 됐지만 말이다.

자본의 국적은 중요한 것일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자본의 국적이 아니라 자본이 몰리는 경제 환경이 아닐까 싶다. 자본의 국적을 따지기보다 돈이 흐르는 환경이 조성되기를 바란다.

문수정 산업2부장 thursda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