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는 광복 80주년이자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80년을 맞는 해다. 2차대전 종전은 제국주의 국가를 일소했지만 권력을 향한 인간의 집착까진 멈춰 세우진 못했다. 종전 직후 미국과 소련 간 냉전이 시작됐고 세계 도처에서 독재 정권이 집권했다. 이슬람 극단주의와 이를 맹종하는 테러집단의 득세는 허다한 난민을 배출했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전쟁은 아직도 진행형이다.
“하나님이 잠든 것처럼 보일 정도로 끊임없이 국가적 차원의 죄악과 혼란, 폭력이 난무한다. 하나님은 여전히 일하시는가.” 선교학자이자 구약학자, 영국 성공회 사제인 크리스토퍼 라이트(78)가 십대 시절 품은 의구심이다. 핵무기 각축전으로 ‘세계 종말’이란 말이 횡행하던 당시 그의 불안감을 잠재운 건 영국 명설교가 마틴 로이드 존스의 하박국 강해서였다. 이때 쌓은 신앙을 바탕으로 케임브리지대에서 신학 박사 학위를 받은 그는 영국에서의 목회와 인도에서의 선교 경험을 바탕으로 국제 선교학계를 이끌었다.
이 책에서 사춘기 시절 인상 깊게 읽은 성경인 하박국을 재소환한 건 지금도 폭력의 역사가 계속돼서다. 금융위기와 기후위기, 팬데믹 공포까지 더해져 상황은 더욱 엄중해졌다. “앞으로 손주들이 마주할 미래가 진정 두렵다”고 재차 고백하는 저자는 “2500년 전 외쳤던 그의 메시지가 오늘날에도 다시 울려 퍼지길 바라는 마음”으로 이 글을 썼다.
성경에서 예언자 하박국이 보이는 감정의 층위는 다양하다. 자국에 만연한 불의를 지켜만 보는 하나님의 방관에 거세게 분노하며 대항한다. 정작 하나님이 당대 제국 바빌로니아의 힘으로 자국을 벌하겠다는 뜻을 밝히자 두려움에 빠지기도 한다. 종국엔 ‘역사의 주관자’인 하나님이 모든 걸 바로잡을 걸 확신하며 믿음의 삶을 살리라 기쁘게 다짐한다.
이러한 사고의 전환이 가능했던 건 하박국이 ‘하나님의 큰 그림’, 즉 인류 역사를 총괄하는 절대자를 인식했기 때문이다. “성경은 개개인뿐 아니라 열방과 피조세계까지 포함하는 ‘거대 내러티브’란 걸 전제하고 현실을 바라봐야 한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하나님이 일견 부재한 것처럼 보여도 그분은 인류 역사 가운데 분명히 현존하며 일하고 있다”는 깨달음이다.
세계사 속 하나님의 흔적을 찾던 저자는 잉카와 마야, 로마와 대영제국 등 여러 제국의 흥망성쇠를 열거하다 “제국은 반복해 세워지고 무너지지만 하나님 나라는 영원하다”고 고백한다. 이어 “하박국 시대의 바빌로니아처럼 오늘날 세계 전역에서 동일한 죄악을 저지르는 국가 또한 주님께서 보고 계실 것”이라고 확언한다. 이는 ‘악은 최후 승리를 거둘 수 없다’는 점에서 인류에겐 희소식이다. 다만 하나님의 정의 구현은 그분의 때와 방식에 맞게 이뤄진다. 인간의 방식과는 거리가 있을 수 있다는 얘기다.
하나님이 “역사와 자연의 주권자”임을 믿는 기독교인은 폭력과 불의로 가득한 세상에서 어떻게 살아야 할까. 저자는 ‘뉴스에 귀 기울이며 세상에서 일하는 하나님 발견하기’ ‘주님의 정의와 은혜 믿기’ ‘탄식과 항의의 기도하기’ 등 5가지 조언을 전한다. 특히 기도할 땐 “위정자가 회개와 구원에 이르고 정의를 행하도록 간구해야 한다”며 “혹 이들이 불의를 행할 땐 이에 대항하는 기도도 해야 한다”고 말한다. 고통받는 이들을 대신해 “악인의 팔을 꺾어달라”고 간구한 시편 기자처럼 하나님께 위정자의 죄악을 고발하는 기도도 필요하다는 것이다.(시 10:12~15)
무엇보다 저자가 강조하는 건 “항의와 불평의 틀에만 갇히지 말라”는 것이다. 암울한 전망에도 하나님의 존재만으로 기뻐한 하박국 선지자의 선례를 따르자고 권한다. 책에서 그는 2010년 아이티 대지진 당시 잔해 위에 앉은 한 여인의 일화를 전한다. 한 기자가 “당신의 하나님은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묻자 그는 이내 답한다. “항상 계시던 곳, 바로 제 곁에 있습니다.” 기록적 재앙에도 여인이 평정심을 유지한 이유다. 정치 양극화 양상 가운데 은혜 아닌 분노만 묵상하는 이들이 새길만한 메시지다.
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