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 보수냐 극우냐

입력 2025-01-23 00:32

미국 대통령 취임식은 국내 행사로 치러지며 외국 정상들을 초청하지 않는 게 전통이라고 한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이런 전통을 깨고 취임식에 10여개국 정치지도자들을 초청했는데 그 면면이 흥미롭다.

아르헨티나의 하비에르 밀레이 대통령, 이탈리아의 조르자 멜로니 총리 등 극우 성향 국가 정상과 유럽 극우 정당 대표가 대거 참석했다. 영국 영국개혁당 대표 나이젤 패라지, 독일 AfD(독일을위한대안) 공동대표 티노 크루팔라, 프랑스 극우 지도자인 에릭 젬무르, 스페인 복스당 대표 산티아고 아바스칼, 포르투갈 셰가 대표 안드레 벤투라, 폴란드 법과정의당을 이끄는 마테우시 모라비에츠키 전 총리 등이 그들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현대 극우 정치의 최대 성공 사례라고 할 만한 자신의 재선을 세계 극우 지도자들과 함께 자축하고 싶었던 것일까. 어쩌면 트럼프 대통령은 극우를 세계 정치의 중앙 무대로 초청한 것인지 모른다.

전 세계를 휩쓰는 ‘극우 르네상스’는 단단하고 수준 높은 민주주의 국가로 여겨지던 독일이나 영국, 프랑스, 오스트리아 같은 나라마저도 집어삼키고 있다. 그렇게 보자면 지금 한국에서 벌어지는 극우파의 준동은 그리 충격적인 게 아닐 수도 있다. 지난 19일 윤석열 대통령 지지자들이 벌인 서울서부지법 습격 사건은 미국 극우파에 의한 2021년 1월 6일 의회 난동을 연상시키면서 한국에도 극우파가 본격적으로 등장했다는 것을 알렸다. 그에 앞서 마치 한국 극우파의 샘플을 선보이기라도 하는 것처럼 극우 청년 조직인 ‘백골단’이 김민전 의원의 지원 아래 국회에서 기자회견을 열었다.

극우파를 주류 정치 무대에 올린 건 윤 대통령이다. 계엄령 선포로 촉발된 대통령 탄핵 사태 속에 극우가 무대 중앙으로 진출했고, 대통령은 이들과 함께 싸우고 있다. 한국 보수 정당은 그동안 극우 세력을 주변화하며 거리를 뒀지만 정권을 넘겨줄 위기 앞에서 그들을 보수 정치의 핵심 동력으로 채택했다. 구치소로 들어가는 대통령이 탄핵 반대 집회에 나온 청년들을 나라의 희망이라고 추켜올리고, 국민의힘 중진인 윤상현 의원이 극우 집회를 이끄는 전광훈 목사에게 90도로 고개를 숙이고, ‘아스팔트 우파’에게 사랑받는 김문수 고용노동부 장관이 보수당 대선 후보 1위로 부상한 것은 극우에 잠식되고 있는 한국 보수의 현실을 보여준다.

이대로 더 간다면 극우가 보수를 대체할 수 있다. 보수를 자처해온 국민의힘은 보수냐 극우냐의 갈림길에 선 것처럼 보인다. 국민의힘 일부 의원들은 이미 극우파의 목소리를 따르며 극우의 길로 향하고 있다. 위헌적 계엄을 단행한 대통령을 옹호하고, 부정선거를 주장하고 법원을 공격한 자들을 비판하지 않고, 격화되는 국민 간 갈등을 더 부추긴다. 극우와 절연하라고 주장하는 인사들은 당에서 쫓겨나거나 소수화되고 있다.

미국 공화당은 트럼프라는 극우 정치가를 거르지 못했고 제어하지 못한 결과 극우 정당이 되고 말았다. 트럼프가 부정선거를 주장하고 폭동을 사주하고 기소됐는데도 그를 다시 대선 후보로 뽑았다. 그 결과 대선 승리를 거머쥐었으나 지금의 공화당을 보수층과 보수 의제를 대변하는 보수 정당, 품위와 가치를 지닌 공당으로 봐주기 어렵다. 전통적인 보수 정치인들은 찾아보기 어렵고 트럼프와 그의 충성파, 여기에 초부유층이 결탁한 정당이 돼버렸다.

윤 대통령은 트럼프처럼 재기를 꿈꾸고, 국민의힘은 공화당처럼 승리를 바라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걸 위해서라면 극우파를 끌어안고 극우 정당으로 나아가도 괜찮다는 것일까. 보수주의자들은 지금 보수를 지키기 위해 극우와 싸워야 하는 게 아닌가.

김남중 국제부 선임기자 nj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