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요환 목사의 새벽묵상] 함께 울고 함께 웃는 우리들

입력 2025-01-22 03:06

행정안전부 발표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23일 기준으로 65세 이상 주민등록 인구는 1024만4550명입니다. 전체 인구 5122만1286명의 20%를 차지합니다. 유엔 기준을 적용하면 대한민국은 공식적으로 초고령사회에 진입했습니다. 반면에 출생아 수는 계속 줄어들고 있습니다. 지난해 2분기 출생아 수가 전년 대비 1.2% 반짝 증가했지만 합계출산율은 0.7명 수준에 머물 것으로 예측합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나라의 전반적인 경제 규모는 앞으로 축소될 수밖에 없고 사회 모든 영역 역시 확대 대신 축소될 것 같습니다.

지난해 노벨물리학상을 수상한 제프리 힌턴 교수는 인공지능(AI) 연구의 선구자로 유명합니다. 그는 인터뷰에서 산업혁명은 기계를 통해 인간의 체력적 한계를 극복했고, AI는 인간의 지능을 대체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AI의 발전과 함께 일자리는 현저하게 줄어들 것이고 특히 일반 사무직의 경우 그 충격이 상당할 것이라고 덧붙입니다.

모든 것이 축소되는 사회에서 그나마 있던 일자리마저 AI에 빼앗기게 된 현실이니 사람들은 예민할 수밖에 없습니다.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걱정이 그 어느 때보다 심각하게 다가옵니다. 마음의 병을 앓고 있는 분들이 과거에 비해 큰 폭으로 증가합니다. 대한민국 전체가 우울증 사회라고 말하는 분도 있습니다.

10여년 전 한병철 교수는 ‘피로사회’라는 책을 펴냈습니다. 이 책은 우리 사회에 우울증 환자가 급격히 증가한 이유를 사회학적 관점에서 제시합니다. 불과 40년 전만 해도 지금처럼 마음의 아픔을 호소하는 분이 많지 않았습니다. 당시는 금지와 억압이라는 규율이 지배하는 사회였습니다. 사회 구성원들은 부정성의 규율과 명령에 순종하는 것을 미덕으로 알았고, 이에 적응하지 못하는 경우 광인이나 범죄자가 됐습니다.

반면에 21세기는 억압이나 금지 대신 뭐든지 할 수 있다는 긍정성 과잉의 성과사회입니다. 학교 언론 도서 광고 등 사회 곳곳에서 뭐든지 할 수 있다는 긍정의 힘이 넘칩니다. 그런데 수많은 개인들이 자기 자신과 전쟁 상태에 있습니다. 세상은 할 수 있다고 말하는데, 정작 성과를 달성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해 파괴적 자책과 자학을 합니다. 우울증은 긍정성 과잉에 시달리는 사회의 질병으로서, 자기 자신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인간을 반영합니다.

초고령사회로의 진입, 초저출산율, AI로 인한 일자리 상실, 성과를 달성할 수 있다고 압박하는 긍정성 과잉의 성과사회, 과연 이런 세상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지금껏 살아온 방식대로 더 치열하게 다투며 ‘너 죽고 나 살자’는 길을 택할 것인지, 아니면 현실은 녹록지 않더라도 우정과 애정이 흐르는 다정한 사회를 구축하며 ‘함께 살자’는 길을 택할 것인지, 우리는 선택해야 합니다.

바울은 로마서 1장에서 11장까지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구원의 진리에 대해 길게 서술합니다. 그리고 12장 1절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은 존재가 됐다면 이에 합당한 새로운 삶을 살 것을 요청합니다.

성도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제시하는 덕목 중 로마서 12장 15절의 말씀이 눈에 들어옵니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 전 이 말씀을 이렇게 이해하고 싶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성도는 서로의 삶을 돌보며 살아야 한다.”

정말 그렇습니다. 경제가 점점 축소되고, 인공지능이 일자리를 빼앗고, 우울증에 시달리기 쉬운 사회일지라도, 우리가 함께 울고 함께 웃는 돌봄의 공동체가 된다면 거대한 사회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능히 모든 것을 이겨낼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집트의 노예로 고통당하던 이스라엘을 돌보셨고 기억하셨던 것처럼(출 2:25) 함께 울고 함께 웃는 우리를 돌보시고 기억하시기 때문입니다. 함께 울고 함께 웃으며 모든 역경을 넉넉히 이기는 새해가 되길 축복합니다.

(안산제일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