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9년 한국인에 첫 세례… 1907년엔 평양대부흥 열기

입력 2025-01-21 03:07
언더우드 선교사는 1887년 1월 23일 소래교회 교인 3명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국민일보DB

1879년은 한국 기독교에서 역사적인 해이다. 한국인이 최초로 세례를 받았기 때문이다. 첫 세례자 이름은 알려지지 않는다. 그는 의주 상인 백홍준의 부친에게서 얻은 성경과 책자를 읽으며 기독교에 관심을 보였고 중국 선교사에게 세례를 받았다. 원래 두 사람이 세례를 요청했었다. 중국 선교사 매킨타이어는 바로 세례를 주는 대신 중국인교회 초신자반에 편입시켰고 그중 학식이 많은 한 명에게는 성경 번역 업무를 맡겼다. 이후 매킨타이어는 이들을 고향 부모에게 보내 ‘예수를 공개적으로 시인할 수 있는 용기’를 시험했다. 그리고 마침내 두 사람 중 번역 업무를 맡았던 한 사람만 돌아와 매킨타이어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그때가 1879년 1월이었다.

매킨타이어는 존 로스와 함께 만주 등지에서 활동하던 스코틀랜드장로교회 파송 선교사였다. 이들은 한국 선교에 관심이 많아 청나라와 조선의 국경인 고려문에서 한국인에게 전도했고 그들과 교제하며 한국어를 배웠다. 성경 번역 작업에도 한국인들을 참여시켰다. 백홍준의 부친은 이렇게 로스 선교사를 만난 한국인이었고 로스 선교사에게 신약성경을 받았다.

두 번째 세례자는 백홍준이었다. 그는 ‘도를 배울’ 목적으로 매킨타이어를 찾아갔고 3~4개월을 보낸 뒤 세례를 받았다. 세 번째 수세자는 이응찬이었다. 그는 7월 세례를 받았다. 이응찬은 로스 선교사에게 한국어를 가르쳐줬고 한글성경 번역에도 참여했다. 그와 동행한 친척도 몇 달간 번역 업무를 돕다가 12월 세례를 받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렇게 4명의 한국인이 매킨타이어로부터 세례를 받았고 한국 개신교 최초의 신앙공동체가 형성됐다.

1907년 1월 2일부터 시작된 평양 장대현교회 사경회는 평양대부흥운동의 출발이었다. 평양대부흥 당시 학생들이 설교를 듣는 모습. 국민일보DB

1907년 1월 2일 평양 장대현교회에서 사경회가 시작됐다. 이는 평양대부흥의 서막이었다. 15일까지 2주간 열린 사경회는 매년 열리던 행사였다. 하지만 부흥사로 명성을 떨치던 길선주 장로가 집회 새벽기도회 인도에 나서면서 분위기가 달라졌다. 1500명이 모인 사경회 첫날, 사람들은 전에 경험하지 못한 죄에 대한 두려움이 엄습했고 어떤 이는 마음이 너무 괴로워 예배당 밖으로 뛰쳐나갔다. 죄를 자복하고 통회하는 성도들의 열기는 오순절 다락방 120문도의 그것이었다.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 블레어는 외국인 선교사와 한국 성도들 사이에 갈등과 반목이 있었음을 고백했다. 그러자 다시 한번 통회자복과 하나됨이 넘쳤다. 이어 성령의 역사가 강하게 임하면서 기도회 참가자들이 서로 일어나 자신의 죄를 공개적으로 고백하기 시작했다. 부흥 현장에는 사회 도덕적으로 이웃에게 피해를 입힌 죄에 대한 뉘우침과 용서를 비는 실천적 회개운동도 진행됐다.

1884년 1월 4일 미국 감리교 주간지 ‘크리스천 애드버킷(The Christian Advocate) 주필인 제임스 버클리가 한국에 관한 기사를 게재하며 한국 선교의 필요성을 역설했다. 버클리는 10여 차례에 걸쳐 한국 선교를 강조하는 글을 게재했고 글을 읽은 독자들은 헌금을 드리며 참여했다.

1888년 1월 5일 이화학당에서 한국 최초의 주일학교가 시작됐다. 메리 스크랜턴 여사가 설립한 이화학당은 1886년 5월 문을 열었다. 1887년 10월 매서인 최성균의 아내가 조선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세례를 받자 다른 여인들에게도 적잖은 도전과 자극을 주었다. 스크랜턴 여사는 여성들만의 집회 필요성을 느껴 이화학당에 12명의 처녀와 3명의 부인이 모인 가운데 주일학교를 시작했다.

2006년 1월 5일 군의관이었던 안수현 대위가 별세했다. 그는 하나님의 가르침에 따라 의술을 펼쳤던 참 의사로 알려진다. 대표작으로 ‘그 청년 바보의사’가 있다.

2008년 1월 11일 한국교회봉사단이 출범했다. 봉사단은 서해안 기름 유출 복구에 한국교회의 힘을 모으기 위해 보수 진보 교단이 하나가 되어 시작됐다.

2007년 1월 13일 ‘2007평양국제대성회 조직위원회’ 대표단이 평양을 방문해 칠골교회와 옛 장대현교회 터에서 평양대부흥 100주년 기념예배를 드렸다.

1936년 1월 20일 평양 숭실전문학교 교장 맥큔 선교사가 신사참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교장 인가가 취소됐다. 이틀 뒤인 1월 22일에는 숭의여학교 교장 스누크 역시 신사참배 거부로 교장 인가가 취소됐다. 앞서 1935년 11월 평안남도 공·사립중등학교 교장회의에서 도지사는 학교 교장들에게 평양신사에 참배를 요구하자 맥큔 등은 거부했다. 맥큔은 미국으로 철수한 뒤에도 일제의 종교정책이 종교 자유를 침해하는 것이라고 비판하면서 한국에 대한 관심을 촉구했다.

1887년 1월 23일 언더우드 선교사는 소래에서 상경한 서경조 정공빈 최명오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앞서 1883년 서상륜은 로스 선교사에 의해 전도인으로 파송을 받아 입국한 후 2년간 70여명의 개종자를 얻었다. 하지만 갑신정변의 여파로 서울에서 전도활동을 할 수 없게 되자 동생 서경조가 사는 황해도 소래에 머물렀다. 그는 이곳에서 주일마다 예배를 드리는 신앙공동체를 형성하는데 이것이 소래교회의 시작이었다. 당시엔 선교사들의 지방 여행이 불가능했다. 그래서 3명의 수세자들은 서울에 와서 세례를 받았다.

미국 감리회 목사인 가우처 박사로 우연히 기차 안에서 만난 보빙사 일행을 통해 미국 교단 선교부가 한국 선교를 시작하도록 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국민일보DB

1884년 1월 31일 미국 감리회 목사이자 볼티모어여자대학교 창립자인 가우처 박사가 일본 주재 미감리회 선교부 책임자인 매클레이에게 편지를 써 선교 사업의 타당성 조사를 위한 한국 답사를 요청했다. 그가 한국 선교를 요청한 것은 기차에서 우연히 조선의 견미사절단(보빙사) 일행과 만나면서다. 보빙사는 조·미수호통상조약 이후 초대 주한미국공사로 부임한 푸트가 고종에게 친선사절단을 미국에 파견할 것을 건의한 것에 따른 방문이었다. 보빙사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시카고로 이동하던 중 가우처 박사를 만났다. 가우처는 기차 안에서 이들 한국인들과 사흘간 교제하면서 한국을 위해 기도하게 됐다. 보빙사의 방미는 한국 선교를 추진하는 계기가 됐고 가우처 박사는 마치 ‘에티오피아 내시 앞에 나타난 빌립’(행 8:26~39)처럼 한국 복음화에 기여했다.

신상목 기자 smsh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