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신감은 곧 자만으로 변했다. 운동선수에게 자신감은 필수지만 겸손을 잃으면 곧 교만이라는 맹독으로 변해 스스로를 공격하게 된다. 겸손함을 회복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기술적인 면에서도 부족한 점이 하나둘 드러났다. 매일 자신에게서 모자란 부분을 발견한다는 건 고통스러운 일이다. 문제를 털어놓고 상의할 사람이 없으니 답답함은 커졌고 해결책은 보이지 않았다. 그렇다고 사내대장부가 호텔 방구석에 혼자 앉아 우는 것은 아무래도 성미에 맞지 않았다. 고민 끝에 인근 교회 부흥회에 참석해 부르짖으며 기도하기로 했다. 당시 내 기도는 절망의 울부짖음이요, 살아남으려는 몸부림이었다. 그런데도 2000년 상금랭킹은 134위로 끝났고 지옥의 레이스인 퀄리파잉(Q) 스쿨에 다시 도전해야 했다.
두 번째라고 해서 절대 쉽지 않았다. 합격 문턱 앞에서 마지막 퍼팅만이 남아 있었다. “하나님, 여기까지 오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이대로 돌아가서야 되겠습니까. 저를 이렇게 보내시렵니까. 제 마음을 붙잡아 주세요.” 짧은 기도를 마치고 눈을 뜨자 공에서부터 컵까지 하얀 선이 그어져 있는 게 아닌가. 칠판 위에 그어진 분필처럼 선명했다. ‘딸깍’ 퍼팅을 성공시키며 극적으로 공동 31위로 올라섰다. 순간 눈이 부셔서 앞이 아른거렸다. 마치 빛이 나를 반기는 듯했다.
PGA 투어 첫 승은 예상하지 못한 순간에 다가왔다. 2002년은 한일월드컵 4강 진출로 온 나라가 들썩거렸다. 그해는 나에게도 기억에 남는 해이다. 5월 컴팩 클래식과 9월 탬파베이 클래식에 연달아 우승컵을 손에 넣었기 때문이다. 컴팩 클래식 3라운드를 마치고 혼자 하루를 마감하는 예배를 드리면서 편안하게 하나님을 의지하는 마음만 있을 뿐 이상하게 긴장도 안 되고 우승 생각도 들지 않았다. 최종 라운드가 열리는 날 17번 홀에서 치핑을 성공시키고 나서 리더 보드를 확인했더니 맨 위에 내 이름이 있었다. 남은 홀은 하나인데 5타나 앞서 있었다.
‘우승이구나.’
그토록 바라던 PGA 첫 우승인데 이상하게 담담했다. 우승 퍼팅에 성공하자 아내가 두 팔을 벌린 채 울먹이며 그린 위로 올라왔다. 나는 멋들어진 세리머니를 하지는 못했지만 아내를 꽉 끌어안았다. 그 순간 도저히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희열이 온몸을 휩쓸고 지나갔다.
골프가방에 꿰매 붙인 태극기에 부끄럽지 않은 국가대표가 됐다. 동시에 한 해에 2승을 거둔 최초의 동양인 선수가 됐다. 한 동료 선수가 “너는 나라에서 스폰서 해주냐”라며 짓궂게 물은 적이 있다. 그의 말이 맞다. 태극기를 달고 다니면서부터 우승하기 시작한 걸 보면 대한민국은 나의 가장 든든한 후원자다.
정리=유경진 기자 yk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