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석열 대통령이 구속전 피의자심문(영장실질심사)에서 이른바 ‘비상입법기구 쪽지’와 관련해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이 쓴 것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고 답하며 책임을 회피한 것으로 파악됐다. 이 쪽지는 윤 대통령이 비상계엄 선포 후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 부총리에게 전달한 것으로, 계엄이 국회 무력화 등 위헌적 목적으로 이뤄졌음을 입증할 증거로 꼽힌다. 구속영장 발부에는 증거인멸 염려와 함께 비상계엄 당시 윤 대통령 지시를 받은 군·경 지휘부의 진술이 사실상 결정타로 작용했다.
19일 법조계에 따르면 전날 영장심사를 맡은 차은경 부장판사는 5분간 최후진술을 한 윤 대통령에게 비상입법기구가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계엄 이후 비상입법기구 창설 의도가 있었는지 물었다. 차 부장판사가 윤 대통령에게 던진 유일한 질문이었다고 한다. 윤 대통령은 잠시 침묵하다 “(쪽지는) 김 전 장관이 쓴 것인지, 내가 쓴 것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며 “비상입법기구를 제대로 할 생각은 없었다”고 답한 것으로 전해졌다.
검찰 특별수사본부 수사 결과에 따르면 최 대행이 받은 쪽지에는 ‘국회 관련 각종 자금 완전 차단’ ‘비상입법기구 예산 편성’ 등이 기재돼 있었다. 검찰은 이를 국회 무력화 등 국헌문란 목적을 입증하는 증거로 본다.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도 영장심사에서 이 같은 점을 강조했다.
공수처는 법원에 제출한 150여쪽 구속영장 청구서에 윤 대통령을 ‘전형적 확신범’으로 지칭했다. 공수처는 윤 대통령이 여러 차례 대국민 담화 등을 통해 비상계엄 정당성을 주장하고 있어 향후 제2의 계엄 등 극단적 조치를 할 수 있다고 주장한 것으로 전해졌다.
반면 윤 대통령 측은 재범 우려에 대해 “말이 되지 않는 얘기”라고 강력 반박했다고 한다. 윤 대통령은 이날 5분간 최후 진술에서 “군인과 경찰은 단순히 계엄 업무와 질서 유지를 수행한 것뿐인데 공모했다며 구속돼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발언한 것으로 전해졌다.
공수처는 앞서 검찰로부터 김용현 전 국방부 장관, 박안수 육군참모총장, 여인형 국군방첩사령관 등 내란 공범들의 수사 자료 1500쪽 이상을 확보하고 심사에 대비해왔다. 공소장 등에는 윤 대통령이 “총을 쏴서라도 문을 부수고 들어가 끌어내”라고 지시했다는 수사 결과가 담겼다. 윤 대통령은 이에 대해 “내 수사 경험에 비춰보면 이들의 진술을 그대로 믿기 어렵다”고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법원은 내란 혐의가 상당 부분 소명된다고 판단하고 영장을 발부했다.
윤 대통령의 위법 수사 주장도 설득력을 잃게 됐다는 평가다. 윤 대통령은 앞서 두 차례 체포영장 발부 및 체포영장 이의신청, 체포적부심, 이번 구속영장 심사까지 다섯 차례에 걸쳐 위법 수사 문제를 제기했으나 모두 법원에서 배척됐다.
박재현 기자 jhyu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