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사고로 휠체어를 타게 된 사람이 심한 감기에 걸렸다. 열이 나고 기침이 멎지 않는다. 전부터 다니던 의원을 찾아 길을 나섰다. 보도는 울퉁불퉁, 건널목은 아슬아슬, 익숙한 길을 ‘산 넘고 물 건너’ 도착했다. 아, 그런데 경사로가 없다. 있는 줄도 몰랐던 계단이 낭떠러지다. 안에는 승강기가 있건만…. 이건 한국에서 장애인의 일상이다. 낙심하는 초보 장애인 앞에 짜잔! 하고 착한 도깨비가 나타나서 요술 방망이를 휘둘렀다. 그러자 보도가 평평해지고 보행자 신호는 길어지고 건물 앞에 경사로가 놓이고 승강기가 스르르 움직이더니, 눈앞에 단골 의사가 ‘펑’하고 나타났다. 이건 가상 현실이다.
이 우화의 가르침은 무엇일까. 장애인은 상황에 따라 장애인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는 얘기다. 의학적으로는 같은 ‘양하지 결손’이라도 앞의 상황에서는 장애가 심하고 뒤의 상황에서는 장애가 없다. 왜 장애가 사라졌을까. 의학적으로 장애를 치유해서가 아니라, 사회적으로 장애를 지원하는 장치를 심어두었기 때문이다. 장애인이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도록 하는 장치를 촘촘하게 심어 놓을수록 장애인의 장애는 줄어든다. 좀 어렵게 말하자면 장애는 ‘사회적으로 결정된다’는 것이다.
장애가 장애가 아니게 하는 사회적 장치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물리적 조건이다. 장애인들이 안전하고 편리하게 생활할 수 있도록 주거, 건축, 도로, 교통, 제품 등에서 장애물이 없는(barrier-free) 구조를 만들면 많은 장애가 사라진다. 그러나 진짜 장애물 없는 환경 조성을 위해서는 곳곳에서 세심한 주의가 필요하다. 장애물은 사라지기도 하지만 새로 생기기도 하기 때문이다.
요즘 음식점에 퍼지기 시작한 키오스크를 시각 장애인의 처지에서 생각해 보자. 두 번째 방식은 장애인들에게 대인 서비스를 제공해 주는 것이다. 뇌병변 장애인에게 풍부한 활동지원 서비스가 제공된다면 이분들의 답답한 생활에 새로운 차원이 열릴 것임은 누구나 상상할 수 있다. 시각 장애인에게, 콩팥 장애인에게, 지적 장애인에게 다양한 돌봄 서비스가 붙어 준다면 장애의 많은 부분이 더 사라질 수 있다.
물리적 조건의 조성만으로는 풀 수 없는 또 다른 많은 문제가 장애인을 위한 돌봄으로 풀릴 수 있다. 지역사회 돌봄 체계의 구축이 장애인 복지의 새 차원을 열어젖히는 계기가 돼야 한다. 장애인에게 돌봄은 ‘기적’일 수 있다.
(재)돌봄과 미래 이사장
전 국민건강보험공단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