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학의 해양 이야기] 해양강국 출발점 ‘연구선’… 선진국선 민간 재단도 적극 도입

입력 2025-01-21 00:35

군함이 해양탐사 초기 장식한 이래
선박, 여전히 조사연구 핵심에 위치
세계 부호들, 해양학 연구 적극 지원
국내에는 정부가 건조한 2척이 전부

해양학(Oceanography)은 관측 자료를 바탕으로 연구가 이뤄진다. 언어적으로도 ‘바다(Oceano)’와 관련된 정보를 ‘그림으로 기록(graphy)’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즉 해양 조사 자료 생산이 연구의 출발점이다. 연구에 필요한 해양 정보를 획득하는 주요 수단은 선박이다. 최근 인공위성, 무인 이동체, 무인 플랫폼, 관측 장비 계류 및 플로트 투하 등을 이용한 무인 해양 조사가 급증하는 추세지만, 선박은 여전히 종합 해양 조사의 핵심 수단으로서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해양 탐사의 역사에서는 인데버호, 비글호, 챌린저호 등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들 모두 영국의 군함이었다. 천체 관측, 미지의 남태평양 탐험, 새로운 수로 개척, 심해 탐사 등 당시의 시대적 요구에 따라 군함이 제공됐고 선박은 각 탐험 목적에 맞게 개조돼 사용됐다. 해양학 관점에서 150년 전 활동한 챌린저호에 최초의 해양연구선이란 별칭을 달기도 한다. 이는 전 대양에 걸쳐 해양학적 조사가 처음 이뤄졌기 때문이다. 1800년 후반 이후 극지 해역 탐험의 시기와 두 차례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해양 조사가 확대됐고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연구선의 형태를 갖추게 됐다.

연구선은 해양과학 및 환경 연구 수행에 적절하도록 설계된다. 따라서 해양 탐사와 연구에 특화된 장비들이 설치되고 탑재된다. 예를 들어 여러 수심에서 물과 생물 샘플을 수집하거나 해저 퇴적물을 채취하는 장비, 수심과 수층 및 해저 구조를 관측하는 음향 탐지 장비들이 포함된다. 연구선에는 연구를 위한 특별한 구획이 마련되고, 이곳에는 연구 장비를 운용하는 공간, 샘플 분석 및 자료 기록을 위한 실험실, 샘플 보관 냉장고 및 냉동시설 등이 포함된다. 선상 작업 중에 바람과 해류의 거친 환경에서도 선박이 안정적으로 위치를 유지할 수 있도록 자동 위치 제어 시스템을 설치하는 경우가 많다. 운영 및 지원 측면에서는 관측 장비를 조작하는 데 필요한 해양 작업 장비, 승선자 개인 공간과 고성능 통신 시스템이 갖춰져야 한다. 연구선은 단순히 이동하는 선박이 아니라 현장에서 실시간으로 연구가 이뤄지는, 움직이는 실험실 역할을 한다.

한국의 쇄빙연구선 아라온호가 2012년 1월 1일 세종과학기지에 이은 제2의 남극기지인 장보고과학기지(2014년 준공)가 건설될 북빅토리아랜드(Northern Victoria Land) 테라노바만(Terra Nova Bay)에 정박해 있다. 당시 연구원들이 기지 건설에 앞서 정밀조사 작업을 위해 배에서 내리자 아델리 펭귄들이 친근하게 다가오기도 했다. 국민일보DB

세계 각국의 연구선은 대부분 연구소, 대학교, 해군, 정부기관 등에서 소유하거나 운영하고 있다. 연구선의 수요자와 공급자는 상호 보완적인 역할을 한다. 예를 들어 연구선 이용자는 해양 연구를 통해 정책 결정자에게 판단의 근거를 제공하고, 연구선 제공자는 해양 자원 개발과 확보를 위해 연구자들에게 필요한 연구 수단을 제공하는 것이다. 연구선은 해양 자원 정보 확보, 해양 영토 경계 설정의 근거 마련, 기후 변화 대응 및 해양 생태계 보호와 관련된 국제 협의에서 발언권 강화를 위한 해양 자료 축적 등의 필요조건이다. 연구선 보유가 해양 강국의 첫걸음이라는 주장이 나오는 이유다. 대부분 국가에서 연구선 건조에 정부기관이나 해군의 지원을 받는다는 사실이 이를 뒷받침한다. 반면 최근 주목할 만한 경향은 민간 분야에서도 필란트로픽(Philanthropic) 연구선이 등장하고 있다는 점이다.

휴렛팩커드 창업자 데이비드 팩커드, 전 구글 회장 에릭 슈미트, 마이크로소프트 공동 창립자 폴 알렌, 헤지펀드 매니저 레이 달리오 등은 해양연구선을 소유하거나 해양연구소를 설립한 억만장자들이다. 팩커드는 미국 몬터레이 베이 수족관 연구소(MBARI), 슈미트는 슈미트 해양 연구소를 설립했다. 달리오는 오션엑스(OceanX)라는 해양 탐사 이니셔티브를 운영 중이다. 이들은 2019년 MBARI에서 열린 회의에서는 ‘핑크 플라밍고 협회(Pink Flamingos Society)’라는 단체를 출범시켰다. 여기에는 앞에 언급한 기관 외에 타이타닉호를 발견한 로버트 발라드 박사가 설립한 해양 탐사 트러스트, 노르웨이 억만장자 셸 잉게 뢰케가 지원하는 기관, 세계 연안 해양생물 다양성 연구를 선도하는 프랑스 타라 오션 재단 등이 포함돼 있다. 협회의 목적은 연구자들에게 연구선을 제공해 공공해양학 연구를 지원하고 수집된 자료를 전체 과학 커뮤니티가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비록 자선사업으로 자금이 지원되는 성격이지만 민간 연구선의 해양학 발전 기여도는 점점 더 커지고 있다. 그들 국가의 해양력 강화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2020년대 들어 해양 연구를 둘러싼 외적 환경은 새롭게 바뀌었다. 2021년 2월 출범한 유엔 해양과학 10년(UN Ocean Decade, 2021~2030년)은 전 지구적 해양 연구의 목적이 단순히 연구 목표 달성에 있지 않고 연구 결과 활용성에 중점을 두고 있음을 보여준다. 후손에게 물려줄 바다가 10년 후에 바람직한 모습을 갖추도록 하는 것이 이 프로그램의 목표다. 핑크 플라밍고 협회는 여기에 발 빠르게 참여해 특정 국가나 선도적인 해양연구소보다 더 가시적인 진척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해저 표면 지형 조사와 심해 환경 및 생물 관측에서 독보적인 성과를 거두고 있으며, 이를 바탕으로 새로운 탐험의 시대에 들어섰다고 역설하고 있다. 이러한 진전을 가능케 한 것은 유인 잠수정, 자율수중로봇(AUV) 및 원격조종수중로봇(ROV)이 탑재된 연구선 덕분이다.

우리나라는 5000t급 연구선 이사부호와 7000t급 쇄빙연구선 아라온호를 보유함으로써 인도양을 포함한 대양 연구와 극지 해역 탐사에 성과를 거뒀으며, 국제적으로도 높은 위상을 자랑하는 해양과학 국가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그러나 국내 연구자들이 대양 연구를 위해 필요한 만큼의 선박 운영일수를 확보하기에는 이 두 연구선만으로는 벅찬 실정이다. 이에 우리나라도 해양 강국으로서 한 걸음 더 나아가기 위해 연구선을 제공하는 자선 재단 하나쯤 등장하는 것도 의미 있을 것 같다.

한국해양한림원 석학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