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최경주 (35) 한국 남자 프로 골퍼 최초로 미국 PGA 투어 진출

입력 2025-01-20 03:04
2016년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 올림픽에서 남자 골프 국가대표 감독을 맡았던 최경주(왼쪽) 장로가 현지 골프코스에서 열린 연습 라운드에서 왕정훈 선수와 밝게 웃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뉴시스

당초 목표로 삼았던 유럽과 아시아를 뒤로하고 약 7개월간 일본 투어에만 전력을 기울였다. 1999년 12월에 있을 퀄리파잉(Q)스쿨 최종전 신청을 하려면 9월 둘째 주까지 서류를 접수해야 했다. 8월 말 상금 랭킹 10위로 일단 진출 기회를 확보한 상태였다. 하지만 티켓이 세 장밖에 없어서 상위 랭커의 결정을 기다려야만 했다. 일본프로골프투어(JGTO)는 미국프로골프(PGA) 투어 못지않게 활성화돼 있어서 일본 선수는 굳이 미국 진출의 필요성을 못 느끼는 것 같았다. 상금 랭킹 1~6위까지 모두 불참 선언을 했고 7~8위는 출전하겠다고 해서 딱 한 장의 티켓만 남아 있었다. 9위였던 호소카와 가즈히코 선수가 결혼식을 이유로 불참을 선언해 기적적으로 진출권을 따냈다.

현지 적응을 위해 10월 중순,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최종전을 2주 앞두고 플로리다주 잭슨빌 시내에서 차로 30분 떨어진 TPC 소우그래스에 간 적이 있다. 미국 PGA에서 직접 운영, 관리하는 코스로서 플레이어스 챔피언십 대회장으로 유명한 곳이다. 헤드 프로를 찾아가 한국에서 온 프로 골퍼라고 인사하고 연습 삼아 코스를 이용하고 싶다고 했더니 단칼에 “노(No)”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민망함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코스 입장을 거절당하자 자존심이 상해서 오기가 발동했다. 미국 진출을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을 때 세상 사람들은 “안 된다”며 고개부터 저었다. 하지만 큰 무대에서 뛰려면 바닥부터 다시 시작하는 것쯤은 감수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배짱 두둑해 보였겠지만 나라고 왜 두려움이 없었겠는가. 그럴 때 버팀목이 되어준 분이 있었다. 피홍배 회장님과의 인연은 하늘이 맺어준 부자지간 같았다.

피 회장님은 아버지처럼 나를 위한 기도와 조언을 아끼지 않으시고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셨다.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 때라 경기가 안 좋았음에도 기꺼이 사재를 털어 투자해 주셨고 그 덕분에 일본 투어를 나갈 수 있었다. “남자가 한 번 마음 먹었으면 죽기 살기로 해봐야지. 골프 하나만 생각해라. 나머지는 내가 다 알아서 해줄게. 기도하는 사람은 이길 수가 없어.” 피 회장님은 내가 미국에 정착할 때까지 2년간 모든 경비를 지원해주셨다.

1999년 11월 22일, Q스쿨 최종 6라운드가 펼쳐졌다. 전날 5라운드를 5언더파로 마친 나는 합격선인 7언더파 공동 30위 안에 들기 위해 3타를 줄여 8언더파가 되게 해 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10번 홀에서 출발한 나는 전반에 버디 2개와 보기 1개, 후반에 버디 2개를 범해 3언더파를 보태 6라운드 합계 8언더파로 경기를 마쳤다. 이제 남은 건 나와 같은 8언더파를 기록해 마무리 샷을 하는 두 명뿐이었다. 둘 중 한 명이라도 버디를 하면 나는 탈락이었다. 하지만 기도가 이뤄졌다.

“만세!”

대한민국 남자 프로 골퍼 최초로 미국 PGA 투어에 진출한 것이다. 동시에 그해 Q스쿨 통과자 중 유일한 동양인이라는 기록도 남겼다. “이제 진짜 목숨 걸고 호랑이를 잡아보자.”

정리=유경진 기자 yk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