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다가 보게 된 40년 전 드라마 ‘사랑과 진실’에 이런 장면이 있었다. 고등학교 교사를 하던 남편이 아내의 병원비를 벌기 위해 학원강사가 되려 한다. 그런데 아내는 남편이 돈에 팔려가는 느낌이라고 매우 속상해하며 반대한다. 1980년대까지도 학원강사가 되는 것은 스승의 역할을 포기하고 돈만 밝히는 것으로 여겨졌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그 시절을 살았던 나에게도 속상해하는 아내의 모습은 다소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우리가 저랬구나…, 우리는 많이 변해 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사회는 그야말로 압축성장을 하다 보니 경제적 지위가 급변하는 사람이 많았다. 그 와중에 변칙으로 부를 축적한 사람도 많다 보니 ‘사람의 도리에 관심을 두기보다 편법을 통해서라도 이익을 얻는 것이 좋다’는 생각이 매우 팽배해 있는 것 같다. 이러한 세태를 반영하듯 요즈음 드라마에 등장하는 빌런 캐릭터는 놀랍도록 인간성을 상실한 모습이다. 그런 모습에 익숙해지기까지 해서 온갖 기만과 정교한 계략으로 목적한 바를 얻어내는 모습을 보면서도 으레 그러려니 하게 되는 것 같아 섬뜩한 느낌마저 든다.
도리와 상관없이 이익만 추구하는 행동은 전파력이 강하지만 이익을 포기하면서 도리를 추구하는 행동은 전파력이 약하다. 그래서 세상이 이렇게 변해온 것이다. 그런데 요즘 우리는 놀라운 방식으로, 생색도 전혀 안 나는 방식으로 다른 사람을 돕는 사람을 본다. 누가 누구에게 베풀었는지 확인되지 않는 베풂의 현장을 목도한다. 이로 인해 많은 사람이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의 행위에 감동을 받는다. 그리고 이러한 감동이 인간다움과 닿아 있음을 느낀다.
손해를 자처하면서 불특정 다수를 위하는 이 힘은 어디서 오는 걸까. 칸트는 인간은 자신 속에서 ‘자연을 인식할 수 있는 지성’만이 아니라 ‘스스로 부여하는 목적이 자연 속에서 실현되기를, 세계가 그 목적에 따라 변혁되기를 요구하는 도덕적 이성’을 발견한다는 입장을 피력한다. 물론 모든 사람이 이러한 도덕적 이성을 발휘하지는 못한다. 그렇지만 한 명의 나쁜 행동이 수많은 사람에게 영향을 끼쳐서 그렇지 세상에 나쁜 사람이 그렇게 많은 것은 아니다. 미꾸라지 한 마리가 물을 흐린다는 말처럼 어쩌면 우리는 극소수의 나쁜 행동에 지나치게 영향받으며 실망하며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일을 망치기는 쉬워도 잘되게 하는 것은 매우 어렵다. 나쁜 행동의 영향은 엄청 쉽게 넓게 퍼지는데 좋은 행동에 대한 소문은 잘 나지도 않는다. 그래서 나쁜 행동이 더 승한 것처럼 보이는 게 세상이다. 그리고 어쩌면 나쁜 행동은 따라 배우기 쉽고 좋은 행동은 따라 배우기 어렵기 때문에 나쁜 행동이 더 승한 것이 사실일 수도 있다. 그렇지만 세상이 지금 어떠한지 확인하며 실망하는 것보다 더 중요하고 필요한 것은 이 세상을 조금이라도 더 낫게 만드는 방법을 고민하는 것이다. 세상이 어떠하든, 우리가 할 수 있고 해야 하는 일은 좋은 행동을 하고 그 전파력을 강화하는 일뿐이니 말이다.
박은미 철학커뮤니케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