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소금] 나와 너

입력 2025-01-18 00:32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체포영장이 지난 15일 집행됐다. 12·3 비상계엄 선포 이후 촉발된 우리 사회의 갈등은 날이 갈수록 커지는 모양새다. 추운 겨울 전국 곳곳에서 벌어지는 탄핵 찬반 집회는 헌법재판소의 탄핵심판이 끝날 때까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지금과 같은 극한 갈등 양상을 보면 과연 심판 이후에도 해소될지는 미지수다.

갈등은 비단 아스팔트 위에서만 벌어지는 건 아니다. 가족이나 친구 사이에서도 수시로 편을 가르는 흉기가 되고 있다. 계엄 선포 이전엔 안부를 묻던 단체 대화방에도 최근 들어 수시로 정치적 이슈를 다루는 유튜브 동영상이나 가짜뉴스가 등장하며 기존의 질서를 깬다.

“정치적인 내용을 자제해 달라”고 요청해 보지만 효과는 없다. 정치적 입장을 신념과 동일시하는 이들이 이런 제안을 받아들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묵묵히 영상과 기사를 퍼 나르며 하고 싶은 말, 듣고 싶은 소리에만 귀 기울일 뿐이다. 다른 의견을 가진 이들은 물론이고 침묵하는 다수를 향한 폭력이라는 인식도 사라진 지 오래다. 대통령을 지지하거나 반대하는 이들 모두 타협의 공간을 찾지 못하고 각자의 공론장을 헤매는 모습이다. 한 번 시작된 의견 차이는 결국 상대를 향한 미움과 저주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교회가 이런 첨예한 정치 갈등의 온상이 되는 건 안타까운 일이다. 보수적인 성향이 짙은 교회 안에선 계엄을 선포했던 대통령을 이해해야 한다는 의견이 들린다. 몇몇 목사나 장로도 사석에서 기자를 만나 “대통령이 오죽했으면 계엄을 선포했겠냐” “부정선거가 대한민국을 망친다”는 등 극우 유튜버들의 주장을 여과 없이 꺼내 놓는다. 대통령은 물론이고 지지자들까지 싸잡아 맹비난하는 반대의 경우도 분명 있다. 결국 나와 의견을 같이하는 이들, 반대 입장에 선 적만 존재하는 초갈등사회로 전락해 버렸다.

허먼 멜빌의 장편소설 모비 딕은 복수와 미움, 자기 파괴적 집착의 악순환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자신의 다리를 가져간 고래를 향한 주인공의 저주는 결국 자신을 파국으로 이끄는 독이 된다. 거대한 복수심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끝을 찾지 못한 채 공전하다 결국 멸망을 앞당긴다는 게 소설의 교훈이다.

“모든 것을 파괴하지만 정복당하지 않는 고래, 나는 너를 향해 나아간다. 끝까지 너와 싸우리라. 지옥의 심장에서 너를 찌르고 증오를 위해 내 마지막 숨결을 너에게 내뱉는다”라던 주인공의 외침은 늘 공허하다.

대한민국을 관통하는 저주의 칼날이 향할 결말도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이스라엘 히브리대 교수를 지냈던 마르틴 부버(1878~1951)가 쓴 ‘나와 너(Ich und du)’에서는 대화가 지니는 힘을 강조한다. 히틀러와 나치, 아우슈비츠로 상징되는 시대를 살았던 저자는 ‘인간 사이 존재론’을 풀어냈다. 인간과 인간의 만남, 그리고 유지하는 데 필요한 가장 중요한 핵심을 대화의 자세에서 찾은 것이다.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고 상대를 나와 같게 만들지 않아야 한다는 메시지가 마치 요즘 같은 때를 위한 선견지명처럼 보인다.

“상대를 이해하기 위해선 그의 신발을 신고 걸어봐야 한다”는 소설 ‘앵무새 죽이기’의 격언도 ‘나와 너’의 메시지와 맞닿는다. 의견이 다른 상대를 이해하고 포용해야 하는 이유는 이처럼 곳곳에 널려 있지만 현실 속에선 도무지 찾아볼 수 없다는 게 아이러니한 현실이다. 상대를 밟아야 나의 정당성이 보장된다는 극도의 이기주의만 만연해 있다.

다시 교회를 돌아본다. 위대한 사랑을 실천했던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이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갈등의 진원지가 되는 건 늘 우려스럽다. 교회가 화해의 중재자로 설 때 비로소 세상 속에서 존재의 의미를 갖게 됨은 명약관화하다. 교회가, 교인들이 먼저 감정적인 반응을 자제하고 상대의 입장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해 보는 건 어떨까. 갈등을 넘어 화해로 이어질 세상을 꿈꿔 본다.

장창일 종교부 차장 jangci@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