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아영 기자의 ‘살롱 드 미션’] 말 못 하는 자를 위해 입을 열라

입력 2025-01-18 00:33
2017년 기자의 가정에 선물처럼 찾아온 아이의 출생 한 달 기념으로 아기 발가락에 엄마 아빠의 결혼반지를 끼워 촬영한 모습.

가만히 있어도 땀이 송골송골 맺히고 취재하러 다니는 게 힘들었던 9년 전 한여름의 기억이 선명하다. 몸이 축축 늘어져 ‘여름이 이 정도로 견디기 힘든 계절이었나’ 싶었다. 평일 저녁 급하게 수액을 맞으러 응급실로 향했다. 이것저것 검사를 하는데 컨디션 난조의 원인이 다름 아닌 임신이라는 사실을 알게 됐다.

그로부터 2주 뒤 산부인과에서 임신 8주 된 태아의 심장 소리를 들었다. 초음파로 1~2㎝ 남짓한 태아의 모습을 보며 우리 부부는 그 자리에서 눈물을 흘렸다. 난생처음 경험한 감격스러운 순간이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다양한 감정이 눈물에 담겼던 것 같다. 태아는 자신의 존재감을 그렇게 드러냈다.

아이를 품고 있었던 기간 중 쉽지만은 않은 시간도 있었지만 여성으로서 행복한 특권을 누렸다고 자부한다. 하루가 다르게 커가는 태아를 초음파로 볼 때마다 출산 후 어떤 모습으로 만날지 수없이 상상하며 그 시간을 보냈다.

한 생명에 대해 경이로움을 느끼고 있을 시기에 지인의 절망스러운 소식을 들었다. 지인은 임신중절(낙태) 수술을 한 뒤 죄책감과 우울증, 자살 충동 등으로 괴로워했다. 배 속 태아에 대한 상반된 상황 앞에서 어떻게 진심을 담아 위로해야 할지 곤혹스러웠다.

낙태로 인해 자신만의 감옥에 갇혔다고 한 그는 “천국에 가서도 하나님을 볼 면목이 없다. 나 자신이 용서가 안 된다”고 절규했다. 이후 오랫동안 육체적·심리적·영적으로 방황하는 그의 모습을 보면서 낙태는 여성의 권리도 행복권도 아님을 알게 됐다.

낙태 후유증을 겪는 여성은 비단 극소수의 사례가 아니다. 2022년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발표한 ‘인공임신중절 실태 조사’에 따르면 여성이 낙태 후 자궁유착증, 습관성 유산 등 신체적 증상을 겪는 경우는 7.1%, 죄책감과 자살 충동 등 정신적 증상을 경험한 경우는 59.5%로 조사됐다. 낙태 클리닉에서 일하다 프로라이프 운동가로 분한 한 인물의 실화를 그린 영화 ‘언플랜드’에는 낙태 후유증으로 고통받는 여성들의 상황이 적나라하게 나온다.

한국은 20년 가까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에서 자살률과 낙태 1위라는 불명예를 안고 있다. 지난해 한국의 ‘만삭 낙태’ 사건은 사회적으로 큰 파장을 일으켰다. 2019년 헌법재판소가 임신중절죄(낙태죄)에 대해 헌법 불합치 결정을 내린 뒤 5년이 지났음에도 국회에서는 후속 법률이 제정되지 않았기에 현재도 일부 병원에서는 임신 30주 이상의 말기 낙태 수술도 암암리에 시행되고 있다. 생명을 대하는 대한민국의 현 실정이다.

낙태율을 줄이려면 국가적으로 미혼모 지원, 생명 인식 개선, 입양 활동 등 근본적 대안이 적극적으로 제시돼야 한다. 무엇보다 여성이 홀로 임신·출산·양육의 짐을 짊어지지 않도록 제도적으로 보호하는 시스템이 절실하다. 사각지대에 몰린 여성이 불가피하게 낙태를 선택하지 않도록, 임신 후 책임을 회피하는 남성의 죄를 묻고 양육비 등을 청구하도록 하는 법 개정도 시급하다. 의료진은 낙태를 선택한 여성에게 적어도 낙태의 여러 후유증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려줘야 한다. 프로라이프 운동에 교회와 크리스천의 적극적인 역할이 더욱 필요한 때다.

“너는 말 못 하는 자와 모든 고독한 자의 송사를 위하여 입을 열지니라.”(잠 31:8) 엄마 배 속의 태아야말로 자기방어 능력이 전혀 없는 절대적 약자다. 이들이 무고한 죽음으로 내몰리지 않도록 누군가는 이들을 위해 목소리를 내야 하지 않을까. 새해에는 여성과 태아의 건강권과 생명권, 행복권이 함께 실현될 수 있는 법 제도가 속히 마련되길 바란다.


글·사진=김아영 기자 singforyo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