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일을 열며] 미래에 초조해하는 지도자

입력 2025-01-16 00:33

창피한 얘기지만 대학에서 영문학을 전공했어도 영어를 잘 못한다. 읽는 것은 어느 정도 되지만 말하기, 듣기는 자신이 없고 특히 영어로 글을 쓴다는 것은 엄두도 못 낸다. 최근 ‘나의 영어 해방 일지’를 펴낸 의료 저널리스트 박재영도 비슷한 수준이었을 거 같다. 그는 도전했다. 영어로 책을 썼다. 당연히 혼자서는 감당할 수 없었겠지만 인공지능(AI) 번역기 딥엘과 생성형 AI 챗GPT가 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박재영은 대한민국 사용 설명서인 ‘K를 팝니다’의 원고지 900장 분량의 우리말 원고를 5개월 동안 완성했다. 그리고 꼬박 1년을 투자해 8만6000단어의 영문 원고로 바꾸는 데 성공했다. 국문본과 영문본 모두 출간됐다. ‘나의 영어 해방 일지’는 그 과정에서 터득한 영어책 쓰기용 AI 활용법이다. 박재영은 “AI의 능력에 깜짝 놀라기도 했고, AI의 한계에 피식 웃음이 나기도 했다”고 한다. 어쨌든 활용만 잘한다면 우리의 한계를 보기 좋게 뛰어넘을 수 있음을 보여준다.

이미 주변에서는 많은 사람이 AI를 활용하고 있다. 기사나 책을 쓰기 위해 챗GPT에 다양한 기초 정보를 찾게 하는 것은 기본이다. 아예 원고도 만들 수 있다. 최근 출간된 ‘비상계엄’은 저자가 ‘챗GPT’라고 당당히 밝히고 있다. AI 하면 챗GPT만 생각했는데 다양한 AI 도구를 활용한 여러 작업이 가능해진 세상이 됐다. 간단히 흥얼거린 멜로디로 그럴듯한 노래를 만들 수도 있고, 이미지 몇 개만으로 훌륭한 홍보 영상도 만들 수 있다.

산업계 지형도 AI를 중심으로 돌아가고 있다. 올해 재계 수장들의 신년사를 보면 AI가 들어가지 않은 내용을 찾아볼 수 없다. 얼마 전 끝난 세계 최대 정보기술(IT)·가전 전시회 ‘CES 2025’의 주제도 단연 AI였다. 지난해 과학 분야 노벨상의 주인공도 어찌 보면 AI였다. 구글 AI 딥마인드 창업자인 데미스 허사비스 등이 노벨 화학상을 받았고, 노벨 물리학상은 AI 머신러닝의 기초를 확립한 존 홉필드 미 프린스턴대 명예교수와 제프리 힌턴 캐나다 토론토대 교수에게 돌아갔다.

“앞으로 인류는 AI를 지배하는 자와 모르는 자로 갈릴 것”이라는 경고가 허튼소리로 들리지 않는다. 결국 ‘모르는 자’에 포함될 것 같은 불길한 예감 때문에 초조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개인적으로야 AI 낙오자가 된다고 대수겠느냐 싶지만 우리 정치인들도 같은 이유로 초조한 마음을 갖고 있을지 생각하면 더 초조해진다. 윤석열 대통령의 12·3 비상계엄 선포 이후 대한민국은 국제 사회의 조롱거리로 전락했고, 자랑스러운 대한민국이 아닌 창피한 대한민국이 됐다. 다행히 민주주의 원리가 작동해 국회가 비상계엄을 해제하고 대통령이 탄핵 절차에 들어갔지만 여전히 진흙탕 속에서 뒹구는 듯한 모습이다. 생각해 보면 정치인들에게도 초조함은 있는 것 같다. 한쪽은 사법 리스크를 안고 있는 대표의 확정판결이 나오기 전에 대선을 치러야 한다는 초조함이 있고, 다른 한쪽은 반대의 초조함으로 국민 정서와는 아랑곳없이 어깃장을 놓고 있으니 말이다.

AI는 과거 우리가 스마트폰을 손에 든 이후 목격했던 세상의 변화와는 상상할 수 없을 혁명을 일으킬 것이라고 한다. 이제 막 초기 단계인 AI 시대에 자칫 첫발을 잘못 들이면 100년까지도 허우적댈 수 있다. 헌법재판소의 결정이 남아 있긴 하지만 많은 이들은 조기 대선을 기정사실로 하고 있다. 이번 대선에서, 나는 선이고 상대방은 악이라는 패거리 정치와 분열의 정치가 계속되지 않을까 초조하다. 대한민국의 미래를 고민하고, 미래에 초조해하는 후보가 나온다면 무조건 찍을 생각이다.

맹경환 문화체육부 선임기자 khmae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