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최경주 (34) 손모아 기도하자 선명하게 보이는 퍼팅라인 “할렐루야”

입력 2025-01-17 03:04 수정 2025-01-19 18:29
최경주 장로가 2016년 인천 영종도 스카이72골프클럽 오션코스에서 열린 SK텔레콤 오픈 1라운드 2번홀에서 파세이브를 성공한 뒤 인사하고 있다. 뉴시스

체력뿐만 아니라 영혼을 가다듬는 시간도 가졌다. 아내와 결혼 전에 한 약속대로 서울 용산구에 있는 온누리교회에 다니고 있었지만 믿음이 뭔지는 몰랐다. 바쁘다는 핑계로 미뤄뒀던 새신자 교육 7주 과정을 6년 만에 마치고 1999년 드디어 세례를 받았다. 내친김에 교회와 기도원을 오가며 간절히 기도했다.

이후 일본 기린오픈 대회에 출전했다. 비행기를 타기 직전 아버지처럼 의지하는 피홍배 ㈜삼정 회장님에게 전화를 걸어 기도 부탁을 했다. 아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기도 부탁을 한 것은 처음이었다. 피 회장님이 온 마음을 다해 드리는 기도 소리가 수화기를 통해 들려왔다. 가슴이 뭉클해지면서 오픈 이후 허전했던 마음이 꽉 채워지는 것 같았다.

연습 라운드 당일 아침, 좁은 침대에서 아들 호준이를 품에 안고 웅크린 채 잠든 아내를 보면서 가슴이 뻐근해졌다. 나 때문에 처자식이 고생한다는 생각에 기도가 절로 나왔다. 다행히 본 경기는 잘 풀렸다. 비 때문에 3라운드가 취소되고 최종 라운드에 들어섰다. 인도의 지브 말카 싱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했다. 마지막 홀에서 네 발자국 거리의 파 퍼팅에 성공해야 연장전에 갈 수 있는 상황이 만들어졌다.

처음으로 경기 중에 눈을 감고 손을 모아 기도했다. 눈을 떴을 때 놀랍게도 잔디 위에 퍼팅 라인이 선명하게 보였다. 공에서부터 홀컵까지 호미로 판 것처럼 길이 나 있어서 그대로 공을 치기만 하면 됐다. 이런 신비한 경험은 처음이었다. ‘딸깍.’ 공이 컵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연장전에 돌입했다.

얼마나 흥분했는지 스코어 접수처에 장갑과 야디지북(홀별 코스 정보를 담은 공략 수첩)을 놓고 오는 바람에 연장전에서는 맨손으로 경기를 해야 했다. 결과는 우승, 첫 해외 우승이었다. 아내에게 “저기 선수들 서 있는 거 보이지. 가서 줄 서 있으면 상금을 줄 거야. 받아 오면 돼”라고 말하고 인터뷰를 하러 갔다. 정신없이 인터뷰하고 돌아왔더니 아내가 큼직한 종이봉투를 들고 있었다.

“그게 뭐야.” “우승 상금이에요. 현찰로 바로 주던데요.” “이게 다 돈이라고.” 입이 떡 벌어졌다. 1200만엔이나 되는 상금을 현금으로 바로 지급해준 것이다. 그렇게 어렵던 해외 우승을 한 번 하니 물꼬가 트인 듯 연이어졌다. 2주 뒤 열린 일본 우베 고산오픈에서도 정상에 올랐다. 이 대회 우승 상금은 2000만엔, 약 2억에 달했다. 연이은 우승에 일본 투어 상금 랭킹 3위로 순위가 급상승하고 언론에서는 ‘반짝’하고 사라질 줄 알았던 최경주의 선전을 앞다퉈 보도했다.

개인적으론 그보다 더 좋은 일도 있었다. 우베 고산 오픈에서 동반 라운드를 했던 일본 선수에게서 고급 정보를 들었기 때문이다. “일본 투어 상금 랭킹 10위 안에 들면 미국 PGA 투어 Q스쿨 최종전으로 곧장 갈 수 있어.” 서툰 영어로 손짓 발짓해 가며 알려준 선수에게 너무 고마웠다. 미국 진출의 문이 예상치 못한 곳에 있었다. 암흑 속 한 줄기 빛이 들어오는 것 같았다.

정리=유경진 기자 yk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