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지하게 웃기는 인생] 슬픔을 두 팔 벌려 맞는 이유

입력 2025-01-18 00:32

지난해 여름 비 오는 월요일 아침 편의점에서 만났던 남자를 잊을 수 없다. 그즈음 아침에 눈 뜨자마자 편의점에서 드립머신 커피를 한 잔 마시고 글을 쓰는 게 일종의 리추얼이었기에 평소처럼 세븐일레븐 성북문화점으로 갔다. 따뜻한 커피를 들고 나오는데 뒷문 밖 작은 테이블에 어떤 남자 혼자 소주를 한 병 놓고 있는 게 보였다. 무슨 사연이 있길래 아침부터 혼자 깡소주를 마시며 떨어지는 빗방울을 바라보고 있는 걸까. 소주병 옆엔 흔한 컵라면 하나 없었다. 순간 인스턴트 어묵탕이라도 하나 사다 건넬까 고민하다가 그만두기로 했다. 저 사람은 누군가의 관심이나 동정을 원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그는 지금 온전한 슬픔과 회한에 잠겨 있으므로 방해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도 인생을 살면서 막막한 기분을 겪어봤기에 그의 텅 빈 눈빛이 무엇을 뜻하는지 알 수 있었다. 행색은 초라해도 다행히 총기를 잃지 않은 40대의 표정이라 금방 털고 일어날 거란 느낌도 들었다.

‘왜 이렇게 인간의 삶엔 슬픔과 심란함이 많은 걸까’라는 상념을 좇다 10년째 다니는 미장원 부원장과 나눴던 이야기가 생각났다. 휴가철 남편과 제주도에 갔던 그녀는 카페에서 우연히 여고 동창을 만났다. 뜻밖의 만남이라 혼자 이 시간에 웬일이냐고 반갑게 물었더니 건설회사에 다니던 남자친구가 현장에서 사고로 숨지는 바람에 너무 괴로워 퇴직하고 혼자 여행 중이라는 대답이 돌아왔다. 미장원 거울을 통해 눈이 마주친 우리는 이야기를 멈춘 채 한숨을 쉬었다. 어째서 슬픈 일은 이렇게 매일 일어나는 걸까. 슬픈 일 없이 밝고 행복한 일만 맞으며 살 순 없는 걸까.

픽사의 애니메이션 ‘인사이드 아웃’은 라일리라는 11살 여자애의 머릿속 감정들을 캐릭터로 만들어 스매시 히트를 기록한 작품이다. ‘기쁨이(Joy)’는 라일리를 행복하게 만드는 데 온 힘을 다하고 ‘버럭이(Anger)’나 ‘소심이(Fear)’는 각각 타고난 능력과 성정으로 라일리를 보호한다. 그런데 ‘슬픔이(Sadness)’는 하는 일이 애매하다. 커다란 안경을 쓰고 뚱한 표정으로 나타나 걸핏하면 “미안해. 나 때문에 또 우울해졌지”라고 사과하기 바쁘다. 기쁨이는 “슬픔이가 무슨 일을 하는지 전혀 모르겠어”라고 비아냥대기까지 한다.

하지만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순간 대활약을 펼치는 건 바로 슬픔이다. 라일리가 하키 시합에서 졌을 때를 떠올리며 슬픔에 잠기다가 친구들의 소중함을 다시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는 우연이 아니다. ‘인사이드 아웃’은 슬픔이가 우리의 삶에 필수적임을 증명해낸다. 슬픔이는 단지 아픔의 상징이 아니라 진정한 관계를 형성하고 성장의 씨앗을 뿌리는 역할을 한다. 슬픔이가 없었다면 라일리의 삶은 감정의 얕은 수면 위를 떠도는 단막극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내친김에 딘 모브쇼비츠가 쓴 ‘창작자를 위한 픽사 스토리텔링’을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다. 모브쇼비츠는 감정이 단순히 캐릭터의 성격을 풍부하게 만드는 도구가 아니라 스토리의 심장 같은 요소라고 말한다. 특히 ‘인사이드 아웃’에서 슬픔이의 존재는 이야기에 깊이와 진정성을 부여하는 핵심적인 장치라고 강조한다. 영화를 보고 책을 읽으며 깨달은 것은 슬픔이라는 감정이 단순히 부정적인 역할에 그치지 않고 공감과 연대의 중심에 있다는 사실이다. 슬픔이야말로 인간을 인간적으로 만드는 감정인 것이다.

내친김에(뭐 이렇게 ‘내친김에’가 많냐고? 죄송하다) 수전 케인의 ‘비터스위트’도 사서 읽었다. 기숙사 생활을 할 때 친구들에게 “너는 왜 늘 슬픈 음악만 듣냐”라는 놀림을 받을 정도로 슬픔에 관심이 많았던 케인 역시 그것이 가진 힘을 깊이 탐구한다. 그녀는 슬픔이 부정적인 감정인 동시에 우리의 내면을 풍요롭게 하는 도구임을 인식해야 한다고 말한다. 슬픔은 단순한 고통이 아니라 우리를 더 깊은 사랑과 연민으로 이끄는 통로라는 것이다.

다시 편의점에서 혼자 소주를 마시던 그 남자를 생각한다. 슬픔에 푹 빠져 본 사람만이 슬픔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의 옆에 있던 소주병은 그의 취약성을 드러내지만,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인간적 아름다움의 근원이다. 그러니 내게 오는 슬픔과 외로움을 외면하지 말자. 슬픔은 고통의 순간을 넘어 인생의 깊은 의미를 선사하는 선물이다. 그리고 그 선물은 우리의 가장 어두운 시간 속에서 반짝이는 빛을 만들어낸다.

편성준 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