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섬情談] 폭력의 글쓰기, 치유의 글쓰기

입력 2025-01-15 00:34

글, 매력적인 소통 방법이나
왜곡된 주장 전파 수단이기도
풍부한 독서로 편협 벗어나야

한국 성인 남녀 독서량이 전 세계 다른 국가와 비교했을 때 현저히 떨어진다는 통계나 발표를 심심치 않게 접하게 된다. 물론 여기엔 변명에 가까운 이유가 여럿 따라붙는다. ‘작금의 대한민국 상황을 생각하면 책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는 주장에서 시작해 책보다는 영상 매체가 훨씬 더 눈과 귀, 더 나아가 뇌를 즐겁게 해준다는 이유까지 꽤 설득력 있게 뒤따르는 게 현실이다.

하지만 독서량 저하와 별개로 한국의 글쓰기 의지는 남다르게 높은 편이다. 글쓰기는 비단 단행본을 펴내는 직업 작가에 국한되지 않는다. 각종 포털 사이트가 운영하는 블로그 글쓰기에서부터 시작해 페이스북, 엑스(X), 인스타그램 플랫폼에 남기는 길고 짧은 글까지 포괄적 범위에서 글쓰기 행위의 연속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독서량의 저하에도 불구하고 글쓰기에 관한 관심 그리고 실천 의지와 열기는 높다고 볼 수밖에 없는 지표가 명백한데, 그 이면에 내재하는 관심사의 근원엔 자기 생각이나 의견을 타인과 나누거나 나타내고 싶은 표현 의지의 활발함으로 봐야 할 것이다.

타인과 생각을 나누는 방식에서 대화를 통한 소통도 있겠지만 글쓰기를 통한 생각의 여운을 남기는 것 역시 분명 매력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일 것이다. 이렇듯 글쓰기는 자신과 타인에게 흔적을 남기고, 그로 인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나름 시대정신과 관련된 화두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글쓰기에는 두 얼굴이 존재한다. 하나는 폭력의 글쓰기, 또 하나는 치유의 글쓰기다. 안타깝게도 오늘, 우리에게 주어진 폭력은 물리적 폭력 이상의 선동과 정서적 압박, 현상 해석의 불균형과 확증 편향 등 수많은 왜곡을 통해 찾아온다는 점을 간과하기 어렵다. 왜곡된 주장을 전파하는 데 있어 가장 강력한 수단이 글쓰기임을 인정하는 건 정말이지 뼈아픈 일이다. 글쓰기가 가진 효능 중 하나는 자기 생각을 타인에게 표현하는 데 있는데, 이 과정에 왜곡된 신념을 담아 타인의 생각을 조종하거나 지배하고 싶은 욕구로 가득한 글쓰기가 스며든다면 그것은 분명 폭력이다.

폭력의 글쓰기는 상대에게 왜곡된 신념을 적극 전파하며 동시에 자신의 기존 신념을 맹목적인 것으로 만들어 타협과 대화를 실종시키는 황폐한 지경으로 끌고 내려간다. 자신의 가치관만이 절대적이며, 이를 타인에게 설득하고 심지어 선동하기 위해 사용하는 글쓰기는 큰 범주에서 국가적이고 문화적 피해로 진화한다.

신비로운 것은 이 정서적 폭력을 자각하고 객관적으로 성찰하는 방법론 또한 글쓰기를 통해 주어진다는 것이다. 글쓰기를 통한 치유의 가능성을 엿보는, 곧 치유의 글쓰기가 폭력의 글쓰기, 그 이면에 눈을 뜨는 것이다.

치유의 글쓰기는 맹목적 신념이 가져온 황폐를 자각하고 새로운 모색과 연대를 시작하고자 하는 절박한 표현 의지에서 비롯된다. 이 경우 여지없는 신비는 이때의 치유 기능 역시 침묵이나 표현의 폐쇄가 아니라 글쓰기를 통해 취득되거나 돌파한다는 데 있다. 정서적 폭력과 억압의 수단 역시 선동과 교조적 교훈으로 점철된 글쓰기를 통해 이뤄지지만 동시에 선동의 글쓰기 방식으로 쌓아 올려진 폭력의 구조를 근본에서부터 돌이키고 새롭게 할 수 있는 치유의 수단 역시 글쓰기를 통해 이뤄진다는 점이다.

치유의 글쓰기를 위해 선행돼야 하는 조건이 있다. 바로 다양한 독서다. 오늘의 독서량 급감으로 인해 찾아온 치명적인 위기는 그로 인해 치유의 글쓰기가 갈수록 약화한다는 사실이다. 입체적 시각으로 주어진 시대를 톺아보고, 대안을 모색하거나 최소한 생각할 수 있는 화두 제시가 가능한 치유의 글쓰기를 지속하려면 다양한 생각과 사유의 긍정적 뒤얽힘이 이뤄지는 풍부한 독서와 궤를 같이해야만 한다. 가짜뉴스의 범람, 비난과 조롱으로 점철된 속도전에 매몰된 댓글이나 게시물 글쓰기의 편협성에서 한 발자국 물러선 글쓰기, 그 글쓰기를 가능케 하기 위한 적극적인 독서 행위가 동시에 요청되는 요즘이다.

주원규(소설가·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