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후보 시절 윤석열의 트레이드마크는 누가 뭐라 해도 ‘법치주의’였다. 특수부 검사 출신으로 역대 대통령의 치부를 수사한 그가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지키겠다며 등장했을 때 국민은 환호했다. 문재인정부 5년을 헌법 가치가 무너지고 법치주의가 위기에 처한 시간으로 규정했을 때 국민은 공감했고, 여기에 힘입어 그는 대통령 자리에 오를 수 있었다. 2022년 3월 10일 당선 인사에서 “우리 국민 누구에게나 공정하게 적용되는 법치의 원칙을 확고히 지켜나가겠다”고 약속했다.
보수 진영을 중심으로 법치 대통령의 성공을 바라는 목소리가 컸다. 법치를 앞세운 그가 헌법과 법률 테두리 안에서 행사하는 공권력은 역대 어느 대통령보다 강력한 민주적 정당성을 확보할 것이란 기대가 깔려 있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에 부응하려는 듯 윤 대통령은 ‘반칙과 특권 없는 법치주의의 확립’을 국정 기조로 내세웠다. 법을 지키는 다수의 편에 서서 법을 어기고 무시하는 소수를 상대로 싸움을 벌인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2022년 12월 민주노총 화물연대 운송거부 사태 때 노조 탄압이란 비판에도 법과 원칙을 내세우며 버티던 모습은 윤석열식 법치주의의 상징적 장면으로 남았다.
그를 정치권으로 불러들이는 계기가 됐던 조국 전 법무부 장관에 대한 수사처럼 야권의 586 운동권 인사를 겨냥한 수사들이 이어졌다. 문재인정부 당시 핵심 인사들과 강력한 차기 대권 후보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도 검찰 수사 대상에 올랐다. 야당에선 ‘검찰독재 타도’를 외쳤고, 가뜩이나 여소야대 국면에서 이런 야당과의 협치가 잘될 리 만무했다. 이에 질세라 야당은 부인 김건희 여사와 장모 최은순씨를 둘러싼 의혹을 물고 늘어졌다. 어쩌면 이때부터 국민은 윤석열식 법치주의에 대해 본격적으로 의심하기 시작했을지 모른다. 가족과 관련한 각종 문제 앞에서 ‘권력층의 반칙에 대응하지 못하면 공정과 민주주의가 무너진다’고 했다던 그의 신념을 찾아보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떨어지는 지지율, 가족 이슈에 대한 여당 내부의 문제 제기, 야당의 반대로 되는 것 하나 없는 정치적 위기 상황에서 그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위헌·위법적 계엄을 돌파구로 택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열흘 넘게 법원이 발부한 체포영장 집행을 거부하고 있다. 요새화된 관저에서 경호처 직원들을 사병화하고, 관저 밖 지지자들을 선동해 법의 적용을 무력화하고 있다. 변호인단을 통해 연일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의 수사가 불법이라는 주장을 펴는 걸 보면 윤 대통령 자신도 그냥 버티기엔 이 상황을 민망하게 여기고 있는 건 아닐까.
이 같은 윤 대통령의 자기모순적 행태에 기막힌 사람들이 제법 많은가 보다. 최근 부쩍 그가 2021년 9월 한 예능프로그램에서 노무현부터 이명박 박근혜 대통령에 이르기까지 권력가들을 수사했던 일을 언급하며 내놓은 발언이 회자되고 있다.
“권력의 편보다 법의 편이 되는 게 훨씬 든든하다. 국민한테 똑같이 법을 지키라고 해야 하는데, 권력자가 법을 어긴 게 드러났을 때 그걸 제대로 처리 안 하면 국민한테 법을 지키라고 할 수 없고 사회가 혼란에 빠진다. 힘 있는 사람에 대한 사건을 얼마나 원칙대로 제대로 하느냐에 달려 있기 때문에 겁이 나고 안 나고의 문제가 아니다. 무조건 원칙대로 해야 하는, 선택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4년 전 이 발언을 관저에 있는 윤 대통령은 기억하고 있을까. 평생 노력해 왔던 법치주의를 지키기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마지막 선택은 하나뿐이다. 체포영장 집행에 응함으로써 대한민국에선 예외 없는 법 집행이 이뤄진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윤석열 법치주의의 결말은 이래야 한다.
김나래 사회부장 nara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