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인천의 구월연습장으로 옮겼다. 그곳은 프로 골퍼가 많지 않은 곳이어서 진짜 골퍼가 왔다는 소문이 금세 퍼졌다. 진심으로 나를 배려하고 응원해주는 구월연습장 회원들이 정말 고마웠다. 맨바닥에 헤딩하는 것처럼 막막하고 미래가 안 보이는 암담한 상황에서 프로 생활을 시작했는데, 내가 제 실력을 발휘 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에서 살펴 주는 분들을 만나니 감사한 마음뿐이었다.
당시 골프채는 반도골프에서 후원받았지만 공은 직접 사서 써야 했다. 공 살 돈이 없어서 빌려 쓰곤 했다. 팬텀에서 후원을 받던 김완태 프로가 자기 이름이 이니셜로 새겨진 공 두 상자를 줘서 그걸 들고 나가 첫 우승을 거머쥐었다. 우승보다 더 기쁜 건 무려 2700만원이나 되는 두둑한 상금이었다. 빚을 갚고 나니 500만원밖에 안 남았지만 얼마나 뿌듯했는지 모른다.
이듬해 1억4000여만원을 벌어 상금왕이 됐고, 그다음 해에는 상금왕뿐만 아니라 9홀 최소타, 36홀 최소타, 54홀 최소타, 72홀 최소타 등 각종 기록을 갈아치웠다. 연습만 한다고 눈총을 받던 내가 ‘한국 골프계를 뒤흔들 무서운 신인’으로 불리게 되면서 주변에서 대하는 것도 달라졌다.
1997년 11월 국가대항전인 월드컵골프대회에 박노석 프로와 함께 대한민국 대표로 출전했다.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 찰스턴 인근의 고급 리조트 키아와 아일랜드 오션 코스에서 열리는 대회에 참석차 난생처음 미국 땅을 밟았다.
오션 코스는 골프 코스 디자인계의 거장 피트 다이의 작품으로, 미국에서 가장 까다로운 코스로 악명 높지만 매우 아름다운 곳이다. 황홀한 경치에 감탄하다가 드라이빙 레인지에 들어선 순간 놀란 입을 다물 수가 없었다. 고무매트 대신에 파릇한 잔디가 깔려 있었기 때문이다. 잔디 연습장이라는 건 상상도 못 해 봤기 때문에 어찌해야 할지 몰라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아따, 잔디 죽인다.” “그런데 여기서 막 땅을 파도 될랑가. 잔디가 상하면 워째.” “한국서 온 촌놈들이 잔디 다 망쳐 놨다고 쫓아내면 안 되니께 조심해서 칩시다.”
한국에서는 샷을 날리다가 골프채로 잔디를 뜨게 되면 대역죄인처럼 구박을 받던 때였다. 잔디는 안 건드리고 공만 치려다 보니 계속 톱 볼만 나왔다. 답답하기도 하거니와 기까지 꺾일 지경이었다. 얼마 지나자 드디어 다른 나라 선수들이 들어왔다. 우리는 이야기를 나누는 척하면서 슬금슬금 옆으로 다가가 그들이 연습하는 걸 곁눈질하며 지켜봤다. “저게 뭐여. 경주야, 쟈들은 잔디를 다 파는구먼.”
외국 선수들은 손바닥만 한 크기로 잔디를 떠내며 시원하게 샷을 날렸다. 박 프로와 나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서로 마주 봤다. “뭐해. 빨리 연습하자고.”
정리=유경진 기자 yk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