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반대 성격을 가진 두 사촌 데이비드(제시 아이젠버그)와 벤지(키에란 컬킨)의 여행은 시작부터 불안하다. 데이비드는 공항 가는 길 꽉 막힌 도로 상황을 이야기하며 벤지에게 어디쯤 오고 있는지 묻는 메시지를 계속 남기지만 답이 없다. 공항에 도착해 수속을 서두르는 데이비드에게 벤지는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말한다. “아까 다 했어. 몇 시간 전에 도착했어. 공항은 일찍 열잖아, 미리 와서 놀고 있었지.”
두 사람은 홀로코스트 생존자인 할머니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 유대인 노부부, 집단학살에서 살아남은 르완다 출신 청년 등으로 구성된 일행과 폴란드를 여행한다. 그런데 벤지가 여행 중간중간 생각한대로 말을 내뱉으며 평화를 깨트린다.
“아픈 역사를 기리는 투어인데 가이드가 너무 사전처럼 정보를 읊는다”고 문제를 제기하는가 하면 강제수용소로 향하는 열차에서 “꼬리칸에 가축처럼 실렸을 조상들의 고통을 망각하고 우리가 일등석에 타고 있다”며 분노를 표출한다.
하지만 벤지는 유머와 친화력으로 특유의 매력을 발산하며 결국 일행과 화해하고 공감을 얻는다. 심지어 생각할 거리를 던졌다는 점에서 높게 평가 받는다. 벤지는 감정 기복이 심하고 ‘필터링이 전혀 안 되는’ 인물이다. 동시에, 데이비드의 표현에 따르면 “온 방안을 환하게 만드는” 부러운 존재다.
영화 ‘소셜 네트워크’(2010), ‘저스티스 리그’(2017) 등으로 잘 알려진 배우 제시 아이젠버그가 두 번째 장편 연출작 ‘리얼 페인’으로 주목받고 있다. 이 영화로 아이젠버그는 지난해 선댄스 영화제 각본상을 수상했다. 그는 초보 감독이라 할 수 없는 만듦새를 보여주며 각본과 연출, 제작을 아우르는 모든 방면에서 재능을 입증했다. 배우 엠마 스톤이 프로듀싱에 참여했다.
키에란 컬킨과 아이젠버그의 호흡은 유쾌하면서도 진지하다. 데이비드는 반듯한 가정을 꾸리고 착실하게 사는 듯 보이지만 강박증과 불면증에 시달린다. 대인 관계를 어려워하고 매사에 걱정과 우려가 지나치다.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데이비드가 벤지를 불안한 눈으로 쳐다보는 이유, 과격한 감정을 쏟아내는 벤지의 아픈 과거가 드러난다.
각자가 자신이 가진 고통을 어떻게 견뎌내는지, 타인의 고통에 얼마만큼 공감하고 연대할 수 있는지 영화는 생각해보게 한다. 홀로코스트가 자행된 폴란드로 배경을 설정해 고통이라는 키워드에 몰입하는 데 도움을 준다. 공허한 듯 복잡한 표정으로 공항 벤치에 앉아 있는 벤지의 얼굴로 영화의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을 구성한 점도 인상적이다.
그렇다고 시종일관 진지한 영화는 아니다. 우울하거나 지루할 틈 없이 웃음을 터트리게 하는 대화와 사건이 계속된다. 관객으로 하여금 ‘웃참’과 ‘울컥’ 사이를 오가게 하는 놀랍도록 영리한 연출이 매력적이다. 인생엔 눈물과 웃음이 공존한다는 것을, 함께 웃고 우는 행위가 서로간의 거리를 가깝게 한다는 사실을 거창하지 않게 표현한다.
커다란 눈에 다양한 감정을 담으며 자유로운 영혼 벤지로 열연한 컬킨은 이 작품으로 올해 골든글로브 남우조연상을 수상한 데 이어 다음 달 열리는 미국배우조합상(SAG) 영화 부문 남우조연상 후보에도 올랐다. ‘나홀로 집에’ 시리즈의 주인공 맥컬리 컬킨의 동생이기도 한 그는 드라마 ‘석세션’으로 2023년 에미상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다. 15일 개봉, 러닝타임 90분, 15세 관람가.
임세정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