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로 대기업 협력사인 중견기업 수는 한국 전체 기업의 1.3% 내외에 그친다. 지난 6일 산업통상자원부가 발표한 ‘2023년 중견기업 기본통계’를 보면 국내 중견기업은 총 5868개사로 2022년 대비 292개사(5.2%)가 늘었다. 중소기업을 졸업하거나 신설된 중견기업이 1036개사였는데, 대기업으로 성장했거나 중소기업으로 회귀한 기업과 휴·폐업한 744개사를 중견기업 집단에서 제외한 결과다. 기업 수는 많지 않지만 중견기업이 우리 수출과 고용에서 차지하는 비중(2022년 기준)은 각각 18%와 13%로 결코 작지 않다. 중견기업의 합산 매출은 지난해 984조3000억원까지 늘어 1000조원 돌파를 눈앞에 뒀다.
지난해 국민일보 취재진은 수도권에서부터 저 멀리 경남 사천까지 전국 방방곡곡을 누비며 ‘경제 허리’ 중견기업의 발자취를 따라가봤다. 우리 경제의 든든한 버팀목으로 성장한 중견기업이 무에서 유를 창조한 기적의 순간을 기록으로 남기는 게 일차적 목표였다. 나아가 이들이 대·중소기업을 잇는 가교로서 제구실을 하고 모두가 건강한 산업 생태계 안에서 뛸 수 있도록 정부 정책 변화를 끌어내는 데 지향점을 뒀다. 그런데 취지와 달리 섭외 과정부터 순탄치 않았다. 중견기업을 찾아가는 길은 거절의 연속으로 험난했다. 기술력이 탄탄한 예비 중견기업으로 대상을 넓혀도 노출을 고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 배경에 대해 한 중견기업인은 “대기업에는 최대한 튀지 않고, 지금 가진 것을 최대한 지키는 게 살아남는 비결”이라고 귀띔했다. 원청과의 갑을 관계에서 불이익을 받지 않을까 눈치를 봐야 하고 제삼자에게 원천기술을 뺏기지 않기 위한 보호본능 등이 맞물려 보수적인 태도를 보이는 곳이 다수였다.
그런데도 5개 중 1개꼴로 마음의 문을 열어준 기업들이 있었다. 이들 기업이 공통으로 털어놓는 애로사항은 크게 두 가지였다. 2세 경영 체제로 넘어가는 과정에서 가업 승계가 힘들다는 것과 지방 소재 기업이 겪는 인력난이다. 정부가 다양한 지원책을 마련하고 있지만 현장에서는 체감하기 역부족이라는 목소리가 컸다. 지방 소재 제조 중견기업을 방문했을 당시 창업주는 “우리는 자본시장 규정에 맞춰 2세로의 지분 이양 절차를 밟고 있지만 주위 이야기를 들어보면 세금 폭탄과 경영난 등으로 어렵게 일군 회사를 물려주지 않고 아예 매각하겠다는 사람이 많다”고 했다. 수도권 인구 집중과 지역 인구 소멸로 인해 겪는 인력난은 당장 닥친 심각한 문제다. 한 중견기업 최고경영자(CEO)는 “취준생 사이에서 마지노선 격인 충남 천안 이남에서는 직원을 겨우 채용해도 근속하기보단 경력을 쌓아가며 이직하는 사례가 잦다”면서 “연구·개발(R&D) 인력은 웃돈을 주고 말 그대로 모셔와야 한다”고 말했다. 과거보다는 형편이 나아졌지만 대기업과 하도급사 간 불공정 실태는 근절되지 못한 듯하다. 최근 만난 중견기업 CEO는 대기업 발주 공사를 끝냈지만 대금을 못 받고 있다며 하소연했다. 그는 “프로젝트 공사 기간을 당기라는 대기업 윗선의 지시가 있어 자재비와 인건비 급등 속에 무리하게 공사를 했는데 그사이 담당자가 바뀌면서 추가 비용을 주지 않겠다고 버티고 있다”고 전했다. 차기 일감을 못 받을까 숨죽여 처분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처지다.
올해도 섭외는 거절의 연속이겠지만, 불안정한 정국 속 한국 경제를 떠받치는 중견기업과 강소기업의 창업 DNA를 널리 알리고 불합리한 현장의 관행을 조금이나마 타파하는 데 언론의 사명을 다하고자 끊임없이 문을 두드릴 것이다. 기업이든 가계든 살림살이가 힘겨운 한 해의 시작이다. 진정성과 진정성이 통하는 만남과 인연을 기다린다.
김혜원 산업1부 차장 kim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