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년 체제’ 대통령 8명 모두 실패…
개헌, 선거법 개정 없는 9번째 성공이 무슨 소용있나
개헌, 선거법 개정 없는 9번째 성공이 무슨 소용있나
12·3 비상계엄으로 촉발된 탄핵 정국이 예상치 못했던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계엄 선포 2시간여 만에 국회가 계엄을 해제하고, 11일 만에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통과되면서 혼란은 조기에 수습되는가 싶었다. 하지만 탄핵안이 가결된 지 한 달이 지난 지금 사태는 보수·진보 양 진영의 극한 대결로 치닫고 있다.
한국갤럽이 지난 10일 공개한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국민의힘 지지율은 34%, 더불어민주당 지지율은 36%였다(그 밖의 사항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홈페이지 참조). 한국갤럽은 “3주 만에 양대 정당 구도가 12·3 비상계엄 사태 이전으로 되돌아간 모양새”라고 평가했다. ‘아스팔트 강경 보수층’을 중심으로 빠르게 결집한 보수 진영은 ‘버티기’에 들어간 윤 대통령을 결사 옹위하는 중이다. 민주당 등 야당은 탄핵과 수사 속도를 높이기 위한 압박 총력전을 펼치고 있다. 평화로운 수습은 물 건너갔다. 이러니 외신마저 찬사를 보냈던 한국 정치의 회복 탄력성이란 게 지독한 정치적 양극화로의 회복을 뜻한 것이었나 싶을 정도다.
어쩌다 일이 이렇게까지 됐나. 국민의힘은 ‘계엄은 잘못됐지만, 탄핵에는 반대한다’는 단번에 이해하기 쉽지 않은 입장을 취하고 있다. 탄핵소추 반대에 이어 대통령 권한대행의 헌법재판관 임명 반대, 내란죄 탄핵소추 사유 철회에 따른 탄핵소추 재의결까지 국민의힘이 내놓는 주장은 헌재의 탄핵심판 지연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그 배경은 단연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상급심 재판 결과가 나올 때까지 시간을 벌기 위함에 있다. “그래도 이재명은 안 된다.” 국민의힘 의원들이 요즘 입에 달고 사는 말이다.
민주당이라고 다른 게 없다. 계엄 직후 사태 수습의 주도권을 쥔 민주당은 시종 조급한 모습이었다. 헌법재판관 임명을 머뭇거리는 한덕수 국무총리를 곧바로 탄핵했고, 이후에도 고비 때마다 ‘탄핵 카드’를 꺼냈다. 결국에는 철회할 내란죄를 탄핵소추 사유에 넣으며 빌미를 줬고, 여당과의 합의를 고려하지 않은 1차 내란 특검법은 폐기됐다. 잦은 헛발질을 유발한 조급함의 이유는 역시 이 대표의 사법리스크 때문이라는 게 정치권의 중론이다. 사법리스크가 현실화하기 전에 조기 대선을 통한 ‘이재명 대세론’을 관철하려는 것이다.
이처럼 현 시점 가장 유력한 차기 주자인 이 대표를 중심으로 한 인물론이 다른 논의들을 잠식하는 모양새다. 12·3 비상계엄이라는 비싼 대가를 치른 뒤 열린 공론장이 “이재명은 안 된다”는 보수, “이재명은 다르다”는 야권의 구호로 채워지면서 진영 간 대립이 심화하고 있다는 얘기다.
개헌을 통한 권력구조 개편 없이는 다음 대통령이 누가 되든 다시 실패할 것이란 정치 원로와 정치·법학 전문가들의 목소리는 묻히고 있다. 여당이 이 시점에 내놓은 개헌특위 제안은 진정성을 의심받고, 정권 탈환에 한 발짝 다가선 민주당은 개헌 논의에 눈길조차 주지 않는 중이다.
이대로라면 우리 사회는 다음에 뽑힐 ‘제왕적 대통령’의 선의에 기대는 정치에서 한발 더 나아가기가 어렵다. ‘누가 돼야 좋은가’가 아닌 ‘누가 돼도 걱정 없는 시스템은 무엇인가’를 질문해야 할 때다. 이미 ‘87년 체제’ 이후 정권마다 개헌이 논의됐고, 정치권과 학계에서는 여러 대안을 차곡차곡 쌓아 왔다. 의원내각제와 분권형 대통령제를 중심으로 한 권력구조 개편안부터 굳어진 양당제를 타파하고 다당제로 가기 위한 선거제 개편 방안까지 그간 논의되지 않은 주제를 찾기가 어렵다. 여러 대안 중 한국 상황에 가장 잘 들어맞을 조합이 무엇일지 논의하고 합의할 일만 남은 것이다.
1987년 이후 선출된 8명의 대통령이 모두 실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다음 대통령이 기적적으로 성공한다 한들 확률은 9분의 1이다. 도박만도 못한 확률 아닌가. 개헌을 주장하는 이들의 의도에 정략적 고려가 숨어 있다 한들 개헌 논의를 시작하지 못할 이유로 삼기에는 우리가 처한 상황이 그리 녹록지 않다.
정현수 정치부 기자 jukebox@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