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엔 카누 겨울엔 스키… ‘철’ 없는 도전 장애는 없다

입력 2025-01-13 01:02
최용범이 지난 6일 강원도 평창 알펜시아 바이애슬론센터에서 진행된 노르딕스키 훈련을 앞두고 양 손에 폴을 쥔 채 포즈를 취하고 있다. 지난해 한국 카누 선수로는 최초로 패럴림픽에 출전했던 최용범은 노르딕스키를 병행하며 동계 패럴림픽에 도전하기로 했다. 평창=최현규 기자

한국 카누 사상 최초로 패럴림픽 무대에 섰던 최용범(BDH 파라스)이 새해를 맞아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장애인 스포츠를 대표하는 겨울 종목인 노르딕스키 선수로 첫발을 뗐다. 최용범은 “노르딕스키를 갓 시작한 터라 걸음마를 떼는 것보다 더 어려운 것 같지만 선배들을 따라가려는 악착같은 모습을 보여주고 싶다”며 “제게 꿈이나 다름없는 동계패럴림픽 출전에도 도전해 또 다른 희망을 전하겠다”고 다짐했다.

최용범은 ‘올림피언’의 꿈을 키우던 비장애인 카누 선수였다. 양쪽 목에 오륜기 타투를 새겼을 정도로 올림픽에 출전하겠다는 의지가 강했다. 군 복무를 마친 뒤 생계를 이어가던 2022년 불의의 교통사고로 왼다리를 잃었지만 장애인 카누에 뛰어들면서 인생 2막을 열었다. 불과 10개월 만에 자력으로 출전권을 얻어 2024 파리패럴림픽에 나섰다. 한국 선수단의 개·폐회식 기수도 맡았다. 카누(스포츠 등급 KL3) 남자 카약 200m 결선에 올라 가장 늦은 8위를 기록했다.

불굴의 도전을 통해 얻은 게 많았다. “장애는 꿈을 좇는 데 전혀 장애가 되지 않았다. 오히려 희망을 발견했다”는 소감을 남겼던 그는 생애 첫 패럴림픽 출전 이후에도 새로운 도전을 주저하지 않았다. 여름엔 카누, 겨울엔 노르딕스키를 병행하기로 했다. 2026 밀라노·코르티나담페초 동계패럴림픽까지는 1년여의 시간이 남았다. 최용범은 “시간상 다소 촉박한 면도 없지 않지만 조금이나마 가능성이 있다면 도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뭐든 열심히 하다 보면 반드시 기회가 찾아올 거라고 믿는다”고 말했다.

지난 6일 강원도 평창 알펜시아 바이애슬론센터에서 만난 최용범은 노르딕스키 기초 훈련에 매진하고 있었다. 그는 함박눈이 펑펑 쏟아지는 궂은 날씨에도 폴을 강하게 찍어대며 눈밭 위를 힘차게 내달렸다. 지난달 말부터 본격적인 훈련에 돌입한 최용범은 노르딕스키에 필요한 체력과 근력을 키우는 동시에 자세와 주행 등 기본기를 익히는 데 집중하고 있다.

카누는 물이 좋아서 시작했다. 어린 시절엔 수영도 즐겼다. 스노보드는 취미로 몇 번 타봤지만 스키는 태어나서 처음 접했다. 그래서 아직까진 겁도 많이 난다고 한다. 최용범은 “처음 좌식 스키를 타보니 생각보다 빠르게 잘 나가서 깜짝 놀랐다. 코너 구간을 도는 기술과 노하우가 부족해 많이 넘어지기도 한다”며 “새로운 세상에 온 것 같은 기분이 들 때도 있다. 그래도 계속 넘어지는 걸 반복하다 보니 잘 넘어지는 법을 배웠다”며 밝게 웃었다.

그는 동·하계 종목을 병행하는 선배 장애인 선수들을 보면서 존경심을 갖게 됐다고 한다. 핸드 사이클과 노르딕스키를 타며 4번의 패럴림픽을 소화한 ‘철의 여인’ 이도연을 대표적 예로 들었다. 더구나 물이 얼어버리는 겨울엔 카누 훈련을 제대로 하기가 어렵다. 카누의 패들처럼 폴을 사용하는 노르딕스키가 비슷해 보여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세상에 쉬운 건 없었다. 물론 입문 초기이긴 하지만 최용범은 현재의 스키 실력을 ‘언급하기 어려운 수준’이라고 자평했다. 그는 “스키를 4,5번쯤 탄 것 같은데 쓰는 근육이나 힘의 정도가 다르다. 사실 패들을 젓는 것처럼 앞으로 나아가면 될 거라 단순하게 생각했는데 완전히 다르다”며 머쓱해 했다. 해외 정상급 선수들의 영상을 수시로 찾아보고 직접 분석하는 일은 하나의 일상이 됐다. 최용범은 “카누로 패럴림픽에 나갔을 때처럼 한 명씩 따라잡으며 성장한다는 생각으로 열정을 쏟는 방법밖에 없을 것 같다. 사실 잘하고 싶어서 나름대로 엄청 노력하고 있다”고 강조했다.

줄곧 카누만 탔던 그는 동계 종목의 낯선 훈련 환경에도 적응해야 한다. 최용범은 “처음 평창에 왔을 때 몸이 날아갈 것만 같은 칼바람이 불었다. 평생 겪어보지 못한 살벌한 추위에 머리가 아파서 ‘괜히 시작했나’라는 생각을 잠깐 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훈련을 마치면 강추위에 노출된 다리 절단 부위에는 동상에 걸린 것 같은 통증이 찾아온다고 한다. 그는 “미지근한 물로 샤워를 하고 나면 통증이 풀린다. 새로운 도전을 하면서 겪게 된 자연스러운 과정이라 생각한다”며 “모든 변화에 조금씩 적응해 나가고 있다”고 전했다.

최용범은 주변의 응원 덕분에 다시 선수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노르딕스키 도전 선언 후에는 “무슨 운동을 해도 잘할 거다. 열심히 하라”는 친구들의 격려가 많았단다. 최근엔 같이 훈련하게 된 2018 평창 동계패럴림픽 노르딕스키 금메달리스트 신의현의 조언도 듣는다. 오랜 기간 국내 최정상을 지키고 있는 신의현은 자신을 뛰어넘는 후배가 나타나길 기대하고 있다.

최용범은 “계속 지켜봐 주시면 좋겠다. 반드시 좋은 모습으로 응원에 보답할 것”이라며 “당장은 실력 격차가 크지만 조금씩 나아가다 보면 대표팀 형들과 경쟁하는 날도 오지 않을까 싶다. 젊음을 앞세워 밀고 가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지난달 장애인 스포츠단 BDH 파라스에 입단했다. 입단 동기는 프로축구 골키퍼에서 장애인 사격 선수로 변신한 유연수다. 둘 다 비장애인 선수였다는 공통점이 있다. 최용범은 “계기가 없어서 유연수와 엄청 친한 사이는 아니지만 같은 입장에서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됐다. 서로 종목은 다르지만 팀 동료로서 응원하고 함께 성장하면 좋겠다”고 전했다.

흔치 않게 비장애인과 장애인 선수 생활을 모두 겪으면서 느끼는 아쉬움도 있다. 그는 실업팀이 많아져서 장애인들이 전문선수에 도전할 기회가 많아지기를 기대했다. 꼭 전문선수가 아니더라도 더 많은 장애인이 밖에 나와 운동을 했으면 한다는 바람도 전했다.

최용범은 “저도 집에만 있어도 봤지만 운동은 필수라 생각한다. 한 번씩은 꼭 도전해봤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그 역시 밖에 나가는 게 두려웠던 시절이 있었다. 하지만 용기를 냈고, 밖에서 살아가는 힘을 얻고 있다. 최용범은 “동료들을 만나다 보니 장애가 더 이상 부끄럽지 않게 됐다. 당당하게 다니는 원동력이 됐고, 서로 의지하며 더욱 성숙한 삶을 살게 됐다”고 말했다.

최용범은 설 연휴까지 훈련을 이어간 뒤 국내에서 생애 첫 노르딕스키 대회에 출전할 계획이다. 그는 “성적은 차근차근 올린다는 생각이지만 타고난 승부욕이 있다. 일단 꼴찌를 하지 않는 게 첫 대회의 목표”라며 미소를 보였다. 겨울이 지나고 나면 세계선수권, 월드컵 등 국제대회에도 출전해 카누 종목에서의 도전도 이어갈 예정이다.

평창=박구인 기자 captai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