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의춘추] 고쳐 쓰기 더 어려워진 국민의힘

입력 2025-01-10 00:39

'한남동 호위무사' 된 의원들
아스팔트 극우와도 손잡아

중도·수도권·청년층 멀어져
대선·지방선거 더 어려워질 것

위기 반전시키는 능력 안보여
재건 위한 특단 대책 고민할 때

나흘 전 의원 40여명이 윤석열 대통령 체포를 막겠다며 한남동 관저로 몰려간 일은 앞으로 국민의힘 미래와 관련해 두고두고 회자될 장면이다. 그걸 보고 ‘함께 마셔야 할 우물에 침을 뱉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국민의힘이라는 공동체 내 다른 구성원들을 염두에 뒀다면 쉽사리 하지 못할 행동이었다.

여당은 탄핵심판 결과에 따라 어쩌면 올해 대선을 치러야 할지 모른다. 일부는 벌써부터 몸풀기를 하고 있다. 모름지기 정당은 큰판에서 이겨야 구석구석까지 따뜻해지기 마련이다. 또 내년 6월 전국동시 지방선거를 앞두고 있다. 지방선거는 후보자가 250명 안팎이고, 당내 경선 후보들까지 합하면 1000명 가까운 사람들이 도전하는 빅이벤트다. 지난해 총선에서 여당이 참패한 데서 확인했듯, 이들 선거에서 좋은 성적을 내려면 결국 ‘중수청’(중도·수도권·청년)의 마음을 잡아야 한다.

그런데도 의원 40여명이 ‘한남동 호위무사’로 나섰다. 관저 근방엔 극우 시위대가 있었다. 국민과 국회를 상대로 계엄령을 선포하고 무장 군인을 보낸 대통령을 지키겠다고 나선 것이다. ‘불법 영장’을 막겠다는 명분을 걸었지만, 윤 대통령과 극우층을 향해 충성 맹세를 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들은 어떻게 그런 행동을 감행했을까. 관저로 간 이들의 상당수는 영남 출신이다. ‘중수청’ 눈치를 보지 않아도 되는 지역이다. 또 배지를 이미 여러 차례 단 의원들도 적지 않다. 무엇보다 이들에겐 3년 반 임기가 남아 있다. 3년 반동안 마실 우물을 확보한 셈이다.

그들과 달리 수도권이나 여야 격전지에서 정치 농사를 짓고 있는 당내 구성원들은 그날 속이 타들어갔을 것이다. 그들의 사정을 잘 아는 초선 김재섭 의원이 방송에 나와 이렇게 비판했다.

“의원들이 관저로 가면 (유권자는) 과연 이거(여당) 찍을 수 있을까 의문을 갖게 된다. 중도보수층이 다 야당으로 넘어가는 걸 왜 보지 못하느냐.”

김 의원은 지난 총선 때 여당에선 유일하게 서울 강북에서 당선됐다. 1.16% 포인트 차로 겨우 당선된 청년 정치인은 수도권 선거에서 ‘중수청’이 얼마나 중요한지 절실히 깨달았을 것이다.

국민의힘은 점점 더 고쳐 쓰기 어려운 정당이 돼 가고 있다. 여당은 지난 총선 때 수도권과 충청권에서 참패한 뒤 스스로 ‘영남당’으로 전락했다는 반성문을 쓰며 변화를 약속했다. 특히 보수·영남권·노령층이라는 전통적 지지층만으로는 전국적인 선거 승리가 어렵다고 진단했다. 아울러 윤 대통령한테 할 말을 해야 하며 수직적 당정관계도 청산하겠다고 다짐했었다.

그렇게 반성했지만 지금 풍경은 어떤가. 지난해 8월 전당대회에서 ‘중수청’ 지지율 회복을 공약으로 내세워 승리한 한동훈 전 대표는 계엄을 비판했다가 ‘또라이 아니냐’는 막말과 물병 세례 끝에 쫓겨났다. 그간 수직적 당정관계도 안 고쳐졌고, 오히려 당대표가 대통령한테 훈계받는 일도 있었다. 지금 한 전 대표 자리는 ‘찐윤’ 비상대책위원장과 원내대표가 차지했다. 또 국민을 놀라게 하고, 국격을 실추시킨 불법 계엄을 해제하는 표결에 참석한 이들이 오히려 그렇게 하지 않은 이들한테 공격받고 있다. 이젠 공격에 더해 탈당도 요구한다. 블랙코미디가 따로 없다. 당 분위기가 이러니 40여 호위무사들이 당당히 거리로 나섰고 ‘아스팔트 극우’에 눈도장을 찍느라 분주했을 것이다.

과거 ‘천막 당사’ 사례에서 보듯 위기는 종종 반전의 기회가 된다. 하지만 언제부터인가 여당에선 그런 반전의 능력이 보이지 않는다. 총선 참패 뒤 진짜 노력했다면 ‘중수청’으로 외연이 확대됐을지 모른다. 대통령을 제대로 견제하고 수평적 관계를 만들었다면 계엄 선포는 엄두를 못 냈을 수 있다. 계엄 사태를 흐리지 않고 국민 눈높이에서 엄중히 수습하고 나섰다면 당이 거듭나는 모멘텀이 됐을지도 모른다. 또 관저로 몰려갈 게 아니라 이번에 윤 대통령과 확실히 관계를 끊었다면 새출발하는 계기가 됐을 수도 있다.

그런데 지독하게 거꾸로만 가고 있는 게 여당이다. 지금은 이랬다가 시간이 지나 그때 가서 당을 고치고 반성하면 국민 마음을 얻을까. 그러기 쉽지 않을 것 같다. 고쳐 쓰는 것도 어느 정도까지다. 지금은 더 꿰매기 불가능할 정도로 해진 구석이 많다. 이런 상황에선 고쳐 쓰기보다는 해체 뒤 새로운 합종연횡이나 재창당이 더 빠른 보수 재건의 방안일지 모른다.

손병호 논설위원 bhs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