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정이의 부모님은 내가 찾아뵙자 놀란 눈으로 쳐다보셨다. 드디어 정식으로 교제 허락을 받은 것이다. 신앙의 길로 들어서는 첫 번째 관문이었다. 현정이에게 정식으로 만나자고 했더니 단서를 하나 붙였다. “같이 교회를 다니면.”
내 귀를 의심했다. 교회에 다녀야 만난다니. 교회가 뭐 하는 곳인지는 몰라도 같이 다니는 거에 대한 거부감은 들지 않았다. 기꺼이 다니겠다고 약속했다. 그렇게 교회를 다닌 지 일주일, 한 달이 지나자 적응이 되기 시작했다. 1992년 처음 만난 우리는 3년간의 연애 끝에 1995년 결혼에 골인했다. 몇 년간의 타향살이 설움이 아내를 만나면서 다 씻겨 나갔다. 우승하면 가장 먼저 기뻐해 줄 사람,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옆에서 위로해주고 격려해주는 든든한 내 편이 생긴 것이다. 내 마음을 가장 잘 이해해주고 내가 꾸는 꿈이 현실이 될 수 있다고 말해주는 사람을 만났다.
결혼 후 인생의 새로운 세계를 접했지만 한편으로는 영적으로 부딪히는 일이 생기기 시작했다. 나는 영적으로 쓰임 받는 사람이 아니었지만 현정이는 영적으로 쓰임 받는 사람이었다. 교회에서는 문제없이 잘 지내도 일상으로 돌아오면 부딪히는 순간이 생겼다. 나는 그 벽을 넘지 못하고 튕겨 나가는 느낌을 받았다. 이로 인해 많은 개인적 사건과 사고가 생겼다. 혼자 방황하며 집을 나가기도 했고 술을 마시기도 했다. 시합에서도 성적이 나지 않았고 열심히 운동을 했지만 만족스럽지 못했다.
오죽하면 회개해야 구원받고 영생을 누릴 수 있다는 말이 있지만 회개라는 말이 정확히 무엇인지 몰랐다. 나름 여자친구를 따라서 여기까지 잘 왔다고 생각했다. 교인으로서 주일을 잘 지키고 봉사도 열심히 한다고 자부했지만 내 오만과 교만이 하늘을 찌르고 있었다. 영적인 세계는 내가 살아온 세상과 180도 다른 세상이었다.
나는 흙수저도 아닌 뻘밭(개펄)에서 자란 ‘펄수저’였다. 펄수저는 녹이 슬고 거칠고 상처가 많았다. 흙수저는 털면 그만이지만 펄수저는 상처와 오만 가지 물건들이 뒤섞여 있어서 이를 다 뽑고 닦아내야 한다. 펄수저의 근성이 사람을 상대하는 일상적인 일에는 적용됐지만 영적으로 부딪히니 해결되지 않았다.
이뿐만이 아니다. 프로 골퍼가 되면 서러움이 없어질 줄 알았다. 그러나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오히려 아마추어 때보다 높은 벽과 깊은 수렁을 마주했다. 골프 연습장마다 학연과 지연으로 얽힌 선후배 관계가 단단히 뿌리내리고 있었다. 실력보다는 연줄이 우선되다 보니 나처럼 골프 황무지에서 무에서 유를 이룬 사람에게까지 기회가 오지 않았다. 나를 이끌어 줄 고향 선배, 학교 선배도 없었고 밀어줄 뒷배도 없었다. 가물에 콩 나듯 기회가 생겨도 내 노력만으로는 잡을 수 없었다.
정리=유경진 기자 yk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