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정동극장의 탄생은 한국 근대 공연예술의 역사와 깊은 관련이 있다. 1908년 문을 연 근대식 극장 원각사(圓覺社)를 복원한다는 의미를 담아 1995년 설립됐기 때문이다. 신극 운동의 요람이었던 원각사는 1902년 한국 최초의 관립 서양식 극장으로 문을 열었다가 1906년 폐쇄된 협률사(協律社)의 후신이다.
협률사는 1902년 고종 황제의 재위 40주년 기념 칭경예식을 위해 궁내부 산하에 희대(戱臺)라는 이름으로 지어졌다. 지금의 광화문 새문안교회 자리에 있었던 희대는 벽돌로 지은 500석 안팎의 원형 실내극장이다. 극장을 뜻하는 중국식 명칭인 희대는 웃음이 만발하는 무대(극장)라는 뜻의 소춘대(笑春臺)로도 불렸다.
하지만 콜레라 창궐로 칭경예식이 연기되자 희대에서 예정된 축하공연도 취소됐다. 대신 전국에서 모인 예인과 재인들을 활용해 공연하는 연희회사 협률사가 만들어졌다. ‘음악과 조화를 이룬다’는 뜻의 협률은 오늘날의 공연을 가리킨다. 원래 예인들이 모인 단체를 가리키던 협률사는 머지않아 희대를 대신해 극장 이름으로 통용됐다.
협률사의 첫 공연이 바로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식 유료 공연 ‘소춘대유희’다. 궁중정재, 민속춤, 판소리, 탈춤, 땅재주 등의 연희를 다채롭게 선보인 것이 특징이다. 당시 공연된 ‘심청가’와 ‘춘향가’의 경우 분창과 무대연출이 가미됐다는 점에서 초기 창극의 형태를 보여준다. 하지만 협률사는 풍기문란이라는 비판을 받은 끝에 1906년 문을 닫았다.
이듬해 관인구락부로 잠시 사용되다가 1908년 문을 연 것이 원각사다. 당시 전속단체 협률사의 단장은 명창 이동백(1867~1949)이 맡았다. 원각사는 연희, 판소리와 함께 창극을 본격적으로 선보였다. 하지만 재정적 어려움, 일본 경시청의 검열 등으로 어려움을 겪다가 1909년 말 문을 닫고 말았다. 그리고 공회당으로 사용되던 건물은 1914년 봄 화재로 소실됐다. 국립정동극장이 개관(당시엔 정동극장) 5년째이던 1999년 극장 뜰에 이동백 조각상을 설치한 것은 자신의 뿌리가 원각사에 있으며 한국 근대 공연의 계승자라는 자부심의 표현이다.
국립정동극장은 2021년 국립 공연장으로 승격되면서 상설공연을 담당하던 단원들을 연희 전문 예술단으로 출범시켰다. 그리고 국립정동극장 예술단은 출범 이후 두 번째 정기공연으로 ‘소춘대유희-백년광대’를 선보였다. 이 작품은 예술단이 ‘소춘대유희’ 복원 공연을 준비하던 중 극장에 100년 넘게 살아온 오방신과 선배 광대 귀신들을 만나며 벌어지는 소동을 그렸다. 우리 소리부터 전통무와 창작무, 궁중음악과 민속음악까지 악가무희 총체극으로 만들어졌다. 특히 멀티 프로젝션 맵핑, 메쉬 홀로그램 등 다양한 미디어아트 기술을 활용해 주목받았다. 하지만 ‘소춘대유희-백년광대’는 당시 코로나 때문에 약 3주의 공연 기간 가운데 1주일 정도만 관객과 만날 수 있었다.
국립정동극장은 올해 이 작품을 예술단의 새로운 공연브랜드 ‘K-컬처시리즈’의 첫 작품으로 선보이기 위해 지난해 11월 나흘간 ‘소춘대유희: The Eternal Troupe(영원한 예술단)’라는 제목으로 쇼케이스를 가졌다. 초연과 비교할 때 기술의 활용보다 연희를 강화해 공연성을 부각한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쇼케이스 이후 관객 만족도와 의견 수렴 과정을 거쳐 친근하고 명료한 제목인 ‘광대’로 변경했다.
오는 15일부터 2월 16일까지 선보일 ‘광대’는 전통의 현대화에 대한 국립정동극장의 미션을 담은 작품이다. 1902년 한국 공연예술의 근대적 기점임에도 불구하고 대중에게 낯설었던 ‘소춘대유희’가 2025년 한층 친숙하게 다가올 전망이다.
장지영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