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윰노트] 내 안의 인종주의

입력 2025-01-10 00:34

‘허름한 패딩=중국인’ 편견
무의식 중에 드러내는 차별
쉼 없이 반성하며 경계해야

실기시험을 앞둔 딸아이의 굳은 몸을 풀기 위해 늦은 밤 인터넷을 검색했다. 다행히 자정이 조금 못 되는 시간, 여성 전용 사우나에 들어섰다. 중년의 여성 직원이 카운터를 지키고 있었다. 그는 추운 날씨에 두꺼운 패딩과 털모자로 감싸고 들어선 우리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그러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을 천천히 걸었다. “유 아 프롬(You are from)….” 직원이 문장을 다 맺기도 전에 나는 거의 반사신경 속도로 머리에 쓰고 있던 털모자를 벗고 멋쩍다는 듯이 웃으며 답했다. “우리가 중국인인지 아셨나 보네요. 우리 한국 사람이에요.” 내 대답에 그는 다른 말도 보태지 않고 신발장 열쇠를 내어줬다.

탕에는 손님이 우리밖에 없었다. 온탕 물도 피로를 풀기에 적당했다. 그런데도 마음이 계속 꺼림직했다. 처음에는 직원이 우리가 한국인인지 알아채지 못해서라고 생각했지만, 내 마음의 결을 따라 들어가 볼수록 직원에 대한 내 반응 자체가 도드라졌다. 그는 분명히 영어로 어디서 왔는지 물었다. 우리를 중국에서 왔느냐고 물어본 것은 더더욱 아니었다. 그런데도 나는 “우리가 중국인인 줄 아셨나 보네요”라고 대답했다. 한술 더 떠서 쓰고 있던 모자까지 벗어 보이며 우리가 한국인이 명백함을 증명하려 했다. 외모상 구별이 쉽게 될 것이 아닌데도 말이다. 도대체 왜 나는 그가 우리를 ‘중국인’이라고 오해했다고 판단하며 거의 본능에 가깝게 즉각적으로 반응했을까. 그날 밤 우리가 대충 차려입고 나간 낡고 허름한 패딩과 모자가 우리를 “중국인”으로 오해하게 했다고 판단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탕에 앉아 생각을 거듭해갈수록 부끄러움에 딸아이 앞에 얼굴을 들 수 없었다. 조금 전 카운터에서 보여준 내 반응은 성별과 빈부, 인종 등의 차별을 비판하며 그러한 차별을 없앨 방법을 탐구하는 윤리학 선생으로서는 절대로 보여서는 안 되는 위선적 태도였다. 심지어 매우 비합리적인 태도이기도 했다. 한국 재벌 수준의 부를 가진 중국인이 한국 인구보다 많다는 이야기를 들은 지 이미 오래됐는데도, 나는 직원이 우리의 낡은 옷을 보고 중국인이라고 생각했다는 비합리적 판단을 즉각적으로 내린 것이다.

‘다민족 사회 대한민국’의 저자 손민서는 많은 선주민이 다른 이주민들에 대한 차별의 원인이 그들이 가진 부정적 속성 탓이라고 이유를 대지만, 실제로 그러한 부정적 속성 자체가 선주민이 자기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허상으로 만들어낸 편견임을 폭로한다. 그러한 의미에서 그는 “인종은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편견에 의해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심각한 문제는 그렇게 만들어진 편견이 우리의 몸과 마음 깊이 각인돼 있어 아무리 차별 문제에 예민한 소위 ‘PC한 사람’이라도 늦은 밤 이성이 무장해제된 상황에서는 마치 본능처럼 불쑥불쑥 솟아나는 그 나쁜 편견에 말과 행동을 장악당해 버린다는 것이다.

최근 여당의 한 의원은 “중국인들이 탄핵 집회에 참여했다”는 확인되지 않는 말로 탄핵 반대 시위대를 선동했다. 일개 국가의 국민을 뜻하는 ‘중국인(국적)’이 대한민국 사회의 뿌리 깊은 혐오 대상으로서의 ‘중국인(인종)’으로 다시금 각인되는 순간이었다. 그가 선동하는 이유는 명백했다. 손에 쥐고 있는 ‘기득권’이 대통령의 어리석은 행위로 인해 순식간에 사라질 위기에 처하게 된 것이다. 우리 안의 인종주의를 쉼 없이 반성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단순히 누군가를 ‘열등한 인종’으로 차별하는 일을 멈추지 않을 뿐만 아니라 결국 그러한 차별로 기득권을 독점하는 이들이 우글대는 사회를 만드는 소극적 동조자가 되고 말 것이다. 그 차별의 피해는, 작금의 한국 사회를 보듯, 결국 우리 모두에게 돌아올 것이며 해외동포들이 ‘한국인’으로 낙인찍혀 차별받아온 역사를 비판할 자격을 잃게 만든다. 내 안의, 우리 안의 인종주의를 심각하게 경계해야 할 것이다.

김혜령 이화여대 호크마교양대학 부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