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며 사랑하며] 무나물을 볶으며

입력 2025-01-10 00:31

“이도 성한 애가, 어째 할머니처럼 이런 걸 좋아하냐?” 고기보다 무나물 먼저 집어 드는 나를 보고 엄마가 입버릇처럼 하던 말이다. 말로는 핀잔을 주면서도, 엄마는 편식이 심한 내가 무나물을 비벼 고봉밥을 깨끗이 비우는 모습을 흐뭇하게 바라보곤 했다. 겨울 무는 동삼(冬蔘)이라 했던가. 가끔 엄마는 채마밭에서 쑥 뽑은 겨울 무를 칼로 툭툭 쳐내고, 무 조각을 손에 쥐여 주었다. 어떤 건 시원하고 달았고, 어떤 건 알싸하고 매워서 퉤퉤 뱉었다. 식탁에 무나물이 올라오는 날, 부엌에서는 경쾌한 도마질 소리가 울렸다. 일정한 박자로 채를 써는 리듬. 그리고 입안에서 퍼지는 무나물의 수수하고 달큰한 맛.

엊그제 엄마가 해주던 그 맛이 그리워, 무나물을 만들었다. 일정한 두께로 무를 썰어야 익는 속도가 비슷한데, 칼질이 서툴러 무채를 곱게 썰지 못했다. 굵기도 제각각이어서 볶다 보니 어떤 것은 익고 어떤 것은 부러져 버렸다. 소금 간을 한 무채에 들기름과 깨, 다진 마늘을 넣고 볶았다. 여기까지는 여느 무나물 조리법과 다를 게 없지만, 엄마의 비법은 쌀뜨물에 있었다. 나는 엄마가 하던 대로 쌀뜨물을 세 숟갈 넣었다. 무나물은 촉촉하고 구수했다.

불 앞에서 국물을 조리며 생각했다. 겨울은 희고 슴슴한 것들을 먹기 좋은 계절이라고. 무나물, 가래떡, 두부, 흰죽. 하얀 식재료를 먹으면 뾰족하게 날이 섰던 마음의 모서리도 뭉근하니 순해지고 부드러워지는 것만 같다. 배불리 먹지 않고 양이 좀 부족하다 싶을 때쯤, 숟가락을 내려놓는다. 속이 편하고 따뜻하다.

병석에 누운 엄마에게 오랜만에 뭇국과 무나물로 간소하게 차린 밥상을 차려주고 싶다. 당신이 자식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이 따뜻하고 뽀얀 나물을 볶아서 입안에 넣어 주고 싶다. 지금 밥물처럼 고이는 감정을 연민이나 슬픔이라 부르고 싶지 않다. 지금껏 당신이 나를 키워온 한 그릇의 포만이라 부르고 싶다.

신미나 시인 겸 웹툰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