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통의 위기를 마주한 한국과 일본 철강 업계가 서로 다른 대미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양국의 대형 철강사들은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이 공언한 ‘관세 장벽’ 강화와 중국산 철강의 공급과잉이라는 구조적 위기에 직면해 있다. 이 문제를 풀기 위해 현대제철은 세계 최대 시장인 미국 현지에 제철소를 지어 보호무역주의를 우회하고자 시도한다. 반면 일본제철은 미국 국적의 철강사를 인수해 규모의 경제를 확보하려다 조 바이든 대통령의 불허 명령에 가로막힌 상황이다.
8일 업계에 따르면 현대제철은 미국 현지에 자동차 강판용 제품을 생산하는 제철소를 짓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현재 텍사스, 조지아, 루이지애나 등 미국 남부에 있는 주(州) 정부들과 투자 조건을 논의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현대제철은 이날 관련 공시를 통해 “지속가능한 성장과 글로벌 경쟁력 확보를 위해 다양한 방안을 검토하고 있으나 현재까지 확정된 사항은 없다”고 밝혔다.
현대제철의 미국 내 제철소 건설 추진은 ‘관세맨’ 트럼프 2기 행정부에 대한 선제 대응으로 해석된다. 미국의 관세 장벽을 우회하고 신임 행정부와 우호적 관계를 구축하겠다는 계산이 깔려있다. 한국의 대미 철강 수출량은 이미 수입 물량 제한(쿼터제)의 영향권 아래 있는데 추가 관세까지 더해지면 타격이 불가피하다.
현대제철이 해외 첫 쇳물 생산 제철소를 미국에 짓겠다고 확정하면, 이는 오는 20일 취임하는 트럼프 당선인에게 주는 축하 선물의 의미도 띤다. 포스코그룹 역시 미국 인도 등 고성장 고수익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 해외 현지에 상공정(고로나 전기로를 통해 철광석을 녹이는 공정) 거점을 확보하겠다는 방침이다.
일본은 현지 공장 설립 대신 미국 철강업의 상징인 US스틸 인수를 추진 중이다. 하시모토 에이지 일본제철 회장은 지난 7일 “바이든 대통령의 위법한 정치 개입으로 심사가 적절하지 않았으므로 (결과를) 수용할 수 없다”며 “미국에서 사업을 수행하는 걸 절대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미 정부 심사가 무효라고 주장하는 불복 소송을 미 법원에 냈다는 사실도 밝혔다.
일본제철이 US스틸 인수에 사활을 거는 이유엔 관세장벽 우회, 중국 철강 업계에 필적할 규모의 경제 확보 목적이 있다. 일본제철이 US스틸을 자회사로 편입시키는 데 성공하면 2023년 쇳물 생산능력 기준 5941만t으로 세계 3위 규모가 된다. 다만 트럼프 당선인도 일본제철의 인수 계획에 반대 입장을 명확히 하고 있다. 업계에서 일본제철이 미국 행정부의 결정을 뒤집기 쉽지 않으리라고 보는 이유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은 일본제철이 US스틸을 완전 자회사로 만드는 대신 자본을 제휴하거나 일부 시설만 인수할 가능성도 열려있다고 분석했다.
업계 관계자는 “총리까지 나서 공을 들인 일본 철강업계의 대미 전략이 사실상 좌초됐다는 점에서 현대제철의 구상도 실제 구현까지 난관이 많을 것”이라며 “현대제철도 미국 행정부·주 정부의 최종 결론이 나오기 전까지는 신중한 자세로 협상에 임해야 한다”고 말했다.
황민혁 기자 okj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