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획 없던 임신 → 낙태… 그 후 심신엔 깊은 후유증

입력 2025-01-09 03:01
게티이미지뱅크

한예나(가명·38)씨는 6년 전 임신중절(낙태) 수술 당시를 생각하면 치가 떨린다고 했다. 3년간 교제한 남자친구와의 사이에서 뜻밖에 임신을 했는데 이 사실을 알리자 갈등이 시작됐다. 남자친구는 재정적으로 결혼할 준비가 돼 있지 않다며 낙태를 요구한 것이다.

혼전임신 후회, 자살 충동까지

한씨는 8일 국민일보와의 통화에서 “진지한 만남 중이었는데 남자친구의 책임감 없는 태도에 배신감을 느꼈다”며 “임신을 계획한 것은 아니지만 아기를 먼저 낳고 결혼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남자친구의 태도를 보고 결혼할 수 있을지 혼란스러웠다”고 회고했다.

기독교 신앙을 가진 한씨는 혼전 임신에 대해 후회하며 회개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은 수습해야 했다. 남자친구의 강경한 요구로 임신 8주 차에 낙태 수술을 했고 결국 남자친구와도 이별했다. 한씨는 “한국에서 미혼모로 사는 게 무서워 낙태할 수밖에 없었다고 스스로 합리화했지만 낙태의 상처는 깊었다”며 “죄책감과 우울증이 심해 자살 충동까지 느낀다. 평생 누구에게도 말 못 할 비밀로 남아 있어야 할 듯하다”며 울먹였다.

송민희(가명·68)씨는 정부가 산아제한 정책을 펼치던 시절 두 번의 낙태를 경험했다. 송씨도 낙태를 선택함으로써 평생 죄책감과 우울증에 시달렸다. 그는 “우울증이 심할 경우 가슴이 막히고 종이 한 장조차 들 수 없을 만큼 무기력했다”고 전했다.

신앙 안에서 지난날을 회개하며 조금씩 치유를 경험한 송씨는 현재 낙태의 심각성을 알리는 데 앞장서고 있다. 송씨는 “낙태하면 태아뿐 아니라 엄마 역시 망가진다는 것을 남녀 모두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자궁유착 제거 수술, 난임 치료도

낙태는 정신적인 아픔뿐 아니라 육체적 후유증까지 남긴다. 20대 초반 남자친구와의 관계로 임신한 뒤 낙태한 최민아(가명·23)씨도 낙태의 대가를 온몸으로 겪었다. 최씨는 낙태 수술을 한 지 6개월 뒤 자궁유착 제거 수술을 받았다. 하지만 수술 후에도 자궁 내막이 회복되지 않아 난임 치료까지 했다. 최씨는 “낙태 후유증은 단순히 육체적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그 선택으로 현재 삶도 흔들리고 있다”고 말했다.


앞선 사례들은 낙태한 여성들이 당면한 현실이다. 2022년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발표한 ‘인공임신중절 실태조사’에 따르면 여성이 낙태 후 자궁유착증, 습관성 유산 등 신체적 증상을 겪는 경우는 7.1%, 죄책감과 자살 충동 등 정신적 증상을 경험한 경우는 59.5%로 조사됐다. 또 낙태 관련 정책에 대해 국가가 해야 할 과제로는 ‘원치 않은 임신을 예방하기 위한 성교육 및 피임 교육’(24.2%), ‘피임·임신·출산에 대한 남녀 공동 책임의식 강화’(21.5%) 등이 꼽혔다.

낙태 상담하는 중학생 증가

김성옥 1549임신상담출산지원센터 국장은 2019년 헌법재판소가 임신중절죄(낙태죄)에 대해 헌법 불합치 결정을 내린 뒤 6년 가까이 이어진 낙태법 공백의 심각성을 상담 현장에서 접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김 국장은 “2~3년 전만 해도 성 경험이 있는 청소년은 주로 고등학생이었는데 최근엔 중학생까지 포함된 분위기”라며 “법의 부재로 낙태에 대한 경각심이 떨어지는 현 상황이 안타깝다. 특히 청소년 성문화 개선과 함께 낙태 예방을 위한 법적·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생명운동연합 대표 김길수 목사는 “낙태 후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나 트라우마를 겪는 이들을 위해 치유 프로그램이 필요하다”며 “교단 차원에서 생명존중위원회 등의 부서를 조직해 상담과 교육 프로그램을 제공하고 회개와 치유, 회복의 과정을 지원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김아영 김수연 기자 singforyou@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