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경의 열매] 최경주 (28) 자매 아버지께 “우승하는 날 데리러 오겠습니다” 장담

입력 2025-01-09 03:05
최경주 장로의 아내 김현정(왼쪽) 권사가 2009년 인천 영종도 스카이GC 오션코스에서 열린 SK텔레콤 오픈에 출전한 남편을 응원하기 위해 세 자녀와 함께 방문해 기념촬영하고 있다. KPGA 제공

자매의 이름은 김현정이다. 자매의 아버지께서 “골프로 현정이를 먹여 살릴 수 있겠냐”고 물으셨다. 나는 “우승하는 날 현정이를 데리러 오겠다”고 약속했다. 여러 어른이 앉아 계셨던 자리에서 얼떨결에 내뱉었다. 무슨 생각으로 당시에 그런 말을 했는지 모르겠다. 참 당차기도 했지만 안면이 두꺼웠다.

“대신 몇 년이 걸릴지는 장담은 못 합니다.” 어른들은 아마 그냥 지나가는 말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그 이후에는 거의 집에 가지 못했다.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다.

1992년 3월 처음 서산에 자리를 잡은 후 10월까지 8개월 동안 이곳에서 훈련에 매진했다. 그중 5개월 동안 연달아 언더파를 쳤다. 그러다 보니 무언가에 확신이 생겼다. 시합에 나가도 등수는 들 수 있겠다고 생각했다. 등수에 들어 트로피를 꼭 받겠다고 결심했다. 고등학교에 트로피를 안겨주겠다고 이사장님과 했던 약속도 지켜야 했다.

여주에서 열리는 서울시장배 대회에 출전 신청을 했다. 무려 5년간의 준비 끝에 참가한 것이었다. 나는 대회에서 개인 우수상과 일반부 개인 우승, 종합우승을 차지했다. 대회에 참가한 모든 선수를 제치고 2관왕을 한 것이다. 우승 트로피를 들고 곧바로 학교로 달려가 이사장님께 약속을 지켰다고 자랑했다.

이사장님은 너무 자랑스럽다면서 그동안 고생했다고 격려해주셨다. 나는 감사 인사를 하고 곧바로 한국남자프로골프협회(KPGA)에 전화해 프로 테스트 신청을 했다. 11월에는 세미 테스트를 보고, 이를 통과해야 정식 회원이 될 수 있었다. 나는 세미 테스트에 한 번에 합격한 후 이듬해 3월 열린 정식 테스트도 2등으로 통과했다. 가을에는 정규 리그에 들어가기 위한 시드(출전자격)를 받기 위해 65명만 뽑는 테스트에 응시해 2등으로 합격했다.

프로 테스트 마지막 날, 3홀을 남겨뒀을 때 언덕 위에 큰 꽃다발을 들고 서 있는 아가씨가 눈에 들어왔다. 현정이였다.

“아니, 오늘 졸업시험이라면서 어떻게 왔어. 그러다가 졸업 못 하는 거 아니야.” “이것도 시험만큼 중요하니까요.” 나를 위해서 중요한 시험도 포기하고 오다니 놀라면서도 고마웠다.

드디어 오랫동안 꾼 프로의 꿈을 이루고 1994년 KPGA 투어에 합류했다. 첫해에는 17등을 기록하며 좋은 성적을 거뒀다. 선배 선수들은 내년에 바로 우승할 수 있겠다며 응원을 아끼지 않았다. 투어에 합류한 지 1년만인 1995년 5월에는 인천에서 열린 KPGA ‘코리안투어 팬텀 클래식’에서 생애 첫 프로 우승을 달성했다.

우승 트로피와 그린 재킷을 받고 여자친구인 현정이의 집으로 찾아갔다.

정리=유경진 기자 yk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