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새해 첫날 발표되던 대통령 신년사가 올해는 없다. 비슷한 탄핵 정국이던 2017년 1월 2일자 신문을 찾아보니 박근혜 전 대통령은 신년사를 배포하지 않았지만 출입기자단과 신년 인사회를 했다. 40여분간 기자들 질문에 답하며 탄핵소추 사유와 관련된 여러 의혹을 반박했다. 윤석열 대통령은 신년사를 내지도, 기자간담회를 하지도 않았다. 새해 첫날 그가 한 일은 서울 한남동 관저 앞에 모인 탄핵 반대 집회 참석자들에게 A4용지 한 장짜리 입장문을 전달한 것이었다. 그는 “주권 침탈 세력과 반국가 세력의 준동으로 대한민국이 위험하다. 여러분과 함께 나라를 지키기 위해 끝까지 싸우겠다”고 했다. 비상계엄 사태가 초래한 정치적, 경제적 혼란에 대한 유감 표명은 한마디도 없고 국민을 편 가르고 지지자를 선동하는 무책임한 모습이었다.
새해가 되면 거의 모든 기관·기업·단체의 장이 신년사를 내놓는다. 올해 눈에 들어온 것은 이창용 한국은행 총재의 신년사다. 최상목 대통령 권한대행 부총리의 헌법재판관 임명을 지지한 대목이 언론에 부각됐지만 그의 신년사는 나머지 부분이 ‘엑기스’다. 한국 경제 현실에 대한 정확한 진단과 구조개혁의 필요성이 잘 정리돼 있어 양질의 보고서를 읽는 느낌을 준다.
이 총재는 신년사에서 수출 둔화의 원인을 우리 내부에서 찾았다. “수출 구조가 다변화되지 못하고 반도체, 자동차 등 몇몇 주력상품 위주로 고착화돼 있기 때문”이라는 진단이다. 특히 “지난 10여년간 미래 수출을 이끌어가야 할 신산업이 개발되지 못했다”는 점에 문제를 제기한다. 한국 주식시장의 회복에 대해서도 지배구조 개선 등 밸류업(기업 가치 제고)이 충분조건이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이 총재는 “미국 주식시장이 매그니피센트7에 의해 주도되고 있듯 혁신적인 새로운 기업들이 경쟁과 창조적 파괴 과정을 통해 주식시장을 이끌어갈 필요가 있다”고 말한다. 자영업자·소상공인 문제에 대해서는 “단기적인 부양과 함께 고통스럽더라도 구조조정 문제에 집중해 잠재성장률을 높여야 한다”고 했다.
이 총재의 신년사가 돋보이는 또 다른 이유는 첫 페이지에 적힌 ‘신년사 작성과 관련해 도움을 준 통화정책국 정책협력팀의 ○○○팀장, ○○○차장, ○○○과장께 감사드립니다’는 문구 때문이다. 대부분 기관장이 부하 직원의 도움을 받아 신년사를 작성할 텐데 이처럼 기여자 이름을 공개한 신년사는 드물다. 이 총재는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직원들 이름을 적었다. 신년사 맨 뒷장에 붙어 있는 참고문헌 목록과 여러 개의 각주는 이 글을 얼마나 공들여 썼는지 알 수 있게 해준다.
사실 신년사 레퍼토리는 뻔할 때가 많다. 경제계 신년사에는 주로 ‘험난한 대외 환경’이 등장한다. 결론도 ‘힘을 합쳐 위기를 헤쳐나가자’는 식으로 비슷하다. 그런데도 대부분 구성원은 해마다 자기가 속한 조직 수장의 신년사를 꼼꼼히 읽는다. 그 안에 공감할 수 있는 조직의 비전과 목표가 담겨 있는지 탐색하는 차원이다. 개개인의 마음을 움직여 조직 발전의 동력으로 삼으려면 누구나 쉽게 알아차릴 수 있는 진정성을 담아야 한다.
올해 정부 최고위급의 신년사는 최 권한대행의 것이다. 1359자 분량으로 지난해 윤 대통령의 5512자짜리 신년사에 비하면 내용은 많지 않다. 급박하게 직을 맡은 상황에서 준비할 시간이 부족했을 것이다. 글 가운데 “모두의 힘과 지혜를 한데 모으면 위기의 해를 위기를 이긴 기적의 해로 바꿔놓을 수 있다고 진심으로 믿는다”는 대목에서 진정성이 느껴졌다. 정국이 매우 어수선하지만 그의 말대로 위기를 기회로 바꿔 연말에는 우리가 기적을 썼다고 자평할 수 있기를 바란다.
권기석 경제부장 keys@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