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지 않는 삶은 없다. 열심히 살지만 삶은 바닥을 드러낼 때가 많다. 현실 안으로 들어가면 무엇을 하든지 성공보다 실패 확률이 높다. 굿 뉴스는 먼 나라에서나 가끔 들려올 뿐 우리와 거리가 멀다. 듣고 싶지 않은 어두운 뉴스만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매일 기록 경신을 하듯 괴담에 가까운 이야기들이 먹구름처럼 뒤덮는다. 어둡고 부정적 경험이 쌓여 가면 삶은 움츠러든다.
세상은 아슬아슬한 게임의 현장이다. 구멍가게만 폐업 위기가 아니라 기업이나 국가도 부도에 시달린다. 사람들은 욕망하는 것에도 지쳐 있다. 오락 문화나 유흥 산업이 성행하는 것은 삶의 피로도가 높다는 뜻이다. 희망했던 것들이 계속 무너질 때 낙관론자보다 비관론자의 논리가 더 설득력을 얻는다. 꿈은 사치로 취급당하기 십상이다. 불평이 상습화되고 미래에 대한 기대감이 소멸하면 오늘 먹고 즐기다 죽자는 쾌락주의가 창궐한다.
절망이 현실이 되면 냉소주의가 득세한다. 사람들은 냉소적으로 되고 눈에는 핏발이 선다. 분노를 해소할 카타르시스를 찾지만 쉽지 않다. 오늘보다 못한 내일이 예견되면 버텨낼 에너지마저 급격히 소진된다. 오랫동안 갇혀 있던 새는 새장을 열어주어도 날아가려 하지 않는다. 장식에 불과해진 날개는 걷기에도 짐이 된다.
반겨주는 내일이 없으면 오늘이라는 시간 역시 실종이다. 삶이 힘든 것은 환경의 열악함만은 아니다. 돈의 많고 적음의 문제도 아니다. 마음의 문제다. 마음의 정원을 돌보지 않았다면 부실 공사로 세워진 고층 빌딩과 같다. 화려한 도시인으로 살아도 마음은 황량한 사막이다. 무서운 것은 불안정한 세상에 지친 마음의 파괴다.
그동안 물질적 생산에 비해 정신적 생산은 턱없이 부족했다. 정신력 부재는 짓누르는 문명의 하중을 버텨낼 재간이 없다. 만성 불면증 환자가 갈수록 늘어난다. 문명의 속도에 적응하지 못한 사람들은 불안감이 심해진다. 서서히 붕괴된 마음의 복원이 시급하다. 깨어진 마음으로는 불만족스러운 현실을 끌어안을 여유가 없다. 마음에 들지 않는 아침을 매일 맞이한다는 것은 고통이다.
불만족은 더 큰 불만족을 키운다. 환경보다 마음이다. 벌어진 상황보다 해석이다.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의 아우슈비츠 포로수용소에서 살아남은 사람의 이야기가 있다. 몰래 주운 유리 조각을 예리하게 갈아 매일 아침 면도를 하며 생존 의욕을 불태운 사람이 절망에 질식하며 죽어가는 가운데서 살아남았다고 한다. 감옥에 있더라도 책을 읽고 체력 단련을 하며 내일을 기다리는 사람에게는 수도원이 된다.
감옥 창가로 날아오는 새의 이름을 지어주고 미세하게 밀고 들어오는 한 줄기 빛에 얼굴을 내밀어 대기의 온기를 받아들인다면 심장은 뛴다. 거친 바다를 항해할 때 눈앞의 파도만 보면 금방 멀미를 한다. 파도가 없기를 바라는 것은 거짓 희망이다. 긴 항해를 하려면 요동치는 배 안에서 살아가는 법을 익혀야 한다.
막연한 희망이나 경박스러운 낙관은 경계해야 한다. 대책 없는 자신감은 금물이다. 그냥 잘될 것이라는 희망은 스스로 주술은 될 수 있지만 또 다른 후유증을 낳을 수 있다. 기다리면 좋은 날이 올 것이라는 기대감은 자칫 자기 학대가 된다. 하루를 버티기 힘들 때 내일은 아득한 미래다. 현실을 정확히 직시해야 한다. 현실을 피해 간 희망이나 행복은 없다. 치열한 현실의 무게를 제대로 진단하고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
삶은 엄중하고 고통은 실시간으로 조여온다. 건드리면 눈물샘이 터지지 않을 사람이 없다. 인생은 고해다. 바다는 바람이 늘 불고 길 잃은 파도는 천 갈래 만 갈래로 요동친다. 무균실 같은 진공 상태의 현실은 존재하지 않는다. 치열한 싸움터에서 살아가는 길은 과연 있을까. 바람 없는 바다를 기원하는 주술 행위는 어리석은 일이다.
고통 없는 삶은 눈속임의 마법이다. 파도를 헤쳐가는 법을 익혀야 한다. 바람이 분다고 불평하는 사람이 있고 바람을 이용해 목적지로 가는 사람이 있다. 흔들어 대는 바람과 친숙해지면 된다. 바람에 흔들리지 않으려면 마음이 단단해져야 한다. 마음이 깨어지면 끝이다. “모든 지킬 만한 것 중에 더욱 네 마음을 지키라 생명의 근원이 이에서 남이니라.”(잠 4:23)
(부산 수영로교회)